2021.04.26
친한 선배의 권유로 대학교 3, 4학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네다섯 명의 팀이 매일 저녁을 요리하는 co-op에 참여했었다. 초보적인 요리 실력 탓에 초반에는 주로 해동된 닭고기를 손질하는 비교적 단순한 일을 가장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따금씩 후식을 혼자서 맡게 되었다.
하루는 야심 차게 크랜베리와 초콜릿 조각이 박힌 쿠키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를 따라 하다 보니 도우가 지나치게 꾸덕해져서 팔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 오로지 내일 나의 손목의 건강을 위해서 근거가 1도 없는 자신감으로 계란을 레시피보다 하나 더 투하했다. 베이킹의 1조 1항인 정확한 계량을 보기 좋게 어긴 것이다.
분명히 독립적인 덩어리로 오븐에 들어간 도우는 이내 납작한 하나의 빵 조각이 되어 그 초라한 모습을 드러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들어봤지만, 그런 일이 거꾸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발견했다. 빵이 맛이 없던 건 기분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 옛 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식물에게 지나치게 많은 물을 주면 해가 되고, 벽난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손에 화상을 입게 된다. 지구의 공전 궤적이 태양으로부터 조금만 더 멀거나 가까웠다면 생명이 출현하지 못했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개인적인 취향과 성향도 적지 않은 부분에서 양 극단보다는 중도로 치우친다.
구름도 하나둘씩 느긋하게 지나가고, 산들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오는 오후 4시 무렵의 늦은 봄, 혹은 초가을의 날씨를 가장 좋아한다. 비빔냉면보다는 식초도 한 방울 넣지 않은 밋밋한 평양냉면을, 펄펄 끓는 갓 내린 다크 로스트 커피보다는 적당히 미지근한 가벼운 향의 커피를 좋아한다.
소설도 롤러코스터처럼 줄거리에 급격한 부침이 있는 대하소설보다는 긴 여운을 남기는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을 좋아한다. 심지어 전쟁 영화도 포탄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태극기를 휘날리며>보다는 서서히 그 긴장을 끌어올리는 <덩케르크>를 좋아한다.
<알쓸신잡>에서 6.25 전쟁 당시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 전차의 장갑의 각도와 두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밀덕’의 면모를 드러낸 김상욱 교수가 코로나 19 시대가 준 가르침에 대해서 올린 글을 작년에 우연찮게 보게 되었다.
바로 “최선을 다 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교훈에 대한 이야기였다. 매일 전심전력으로 무언가를 하다 보면 금세 지치고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 마련이다. 재택근무와 언택트 업무로 전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소한 극심한 피로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가진 역량의 65% 정도를 써야 보다 온전하고 보람찬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취지의 인상 깊은 글이었다. 자동차에 있는 내연기관도 그 회전 속도가 너무 높아지면 출력되는 돌림힘(토크)이 어느 시점부터는 오히려 감소하는 이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상욱 교수의 글을 만약 이카루스가 읽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너무 욕심을 내지 않고 적당한 고도로 침착하게 순항했으면 날개가 녹아서 바다로 비참하게 추락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금은 욕심을 덜 내고,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매번 격렬하게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의 연약함에 대해서 약간은 더 솔직해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성실히 사는 것을 나무랄 사람은 없다. 다만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쿠키를 맛있게 먹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