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5
그 이전에도 들었지만, 특히 성장판이 닫히고 나서부터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할 때 밥 먹듯이 들었던 말이 있다. (뷔페를 가는 날이면 그 빈도가 눈에 띄게 높아진다.)
“배부르면 남겨도 괜찮아.”
아마도 섭취한 음식의 질량이 이제는 더 이상 세로축을 따라 쌓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로축을 따라서만 축적되기 때문일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한국에서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김남일 선수의 별명이 “진공청소기”라는 사실은 전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먹성이 좋아서 필드가 아닌 식탁 위의 진공청소기 마냥 밥을 먹을 때마다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접시와 그릇을 깔끔하게 “청소”하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고깃집을 갈 때처럼 장거리 레이스에 출전할 때는 적절한 페이스 조절을 하면서 끝까지 젓가락을 놓지 않았다. 반찬도 너무 매운 것만 아니면 골고루 1:1 마킹을 하며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기도 했다. 일단 식탁 위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야를 벗어나는 그릇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아직도 배가 고픈” 푸드 파이터의 집념은 가벼이 여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는 정식으로(?)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많은 경우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이 전성기인 점을 고려하면 이런 부질없는 고민을 훨씬 일찍 했어야 하는 게 맞다.
(여담이지만 “맛있는 녀석들”의 4인방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프로들이다. 그들의 건강이 진심으로 걱정이 되면서도 무한한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작년 3월 중순, 학교가 속한 카운티에서 코로나 19로 인한 봉쇄조치가 시작된 직후부터 몇 달 동안 말 그대로 먹고 자기만 하면서 7kg가 넘게 쪘다가 연말연시에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겨우 체중을 정상 범위로 되돌린 경험도 한몫을 했다.
옛 버릇이 순식간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이제는 무리하면서 먹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선다. 뷔페나 고기를 구워 먹는 자리를 가기 전에는 그 직전의 한 끼를 사실상 거르는 비굴한 편법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제는 뷔페를 가도 느낌이 오는 대로 쓸어 담지는 않는다. 바로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눈치가 보이는 까닭도 있다. 하지만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늘 정면에 배치된 초밥의 유혹에 빠져서 배를 채우다가 튀김이나 후식을 하나도 먹고 오지 못하면 그 통렬한 후회는 인정하기 싫을 만큼 오래 지속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후회를 하면서 위에 부담까지 주는 것은 좋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다가 깨서 물을 마시고 싶으면 약간 부족하다 싶을 때 그만 따르게 되고, 비상상황이 아닌 이상 커피는 미디엄 사이즈가 적당한 것 같다. 그리고 분명히 혼자 저녁을 먹으려고 배달을 시켰는데 젓가락 두 개가 봉지에서 나올 때의 깊은 자괴감은 형용하기 어렵다. 소위 “현타”가 오면서 밥맛도 잃게 된다. 불필요한 오해는 가급적이면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상책이다.
언젠가부터 부모님의 레퍼토리에 새로운 대사가 추가되었다.
“1인분만 먹자.”
이 외에도 자매품으로 “아침에는 사과 하나랑 그릭 요거트가 딱 좋은 것 같아,” 그리고 “점심에는 두부를 데쳐 먹으면 맛있더라”와 같은 정겨운 바리에이션도 있다.
이 말씀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영어 관용구가 떠오른다. “Don’t bite off more than you can chew.” 무엇이든지 자신이 무리하지 않고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되돌아보면 밥을 먹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모종의 공허함이 느껴질 때면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일부러 일을 많이 벌리고 약속을 많이 잡는 경향이 있다. 정작 가장 집중해야 할 일에 지장이 생길 정도로 그러기도 한다. 그 육체적, 정신적 업보를 치른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에 유승민 의원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라고 단호히 비판할 때와의 동일한 강도로 알랭 드 보통이 한 강연에서 “워라밸은 완전한 허구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부분이 완벽한 삶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지혜로운 태도라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일이든, 만남이든 약속은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하지만 너무 부담이 된다 싶을 때는 조금 남겨도 괜찮지 않을까. 이번에는 실수를 했다면 다음번에는 조금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장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긴장은 도움이 되지만, 지나친 부담은 몸에 해를 끼치기 마련이다.
매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정답이 무엇인지는 알기 쉽지 않다. 그저 오늘도 1인분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텃밭을 성실히 가꾸며 자신에게 허락된 인연들도 보다 소중히 가꿀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