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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Aug 17. 2021

창문

2021.05.02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 (2012.06.05)


10년, 혹은 그보다 오히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거의 얼굴을 보지 못한 고등학교 선배들과 4시간이 넘도록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들은 생각들.


성장기의 공통된 경험이 주는 유대감은 생각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아무 설명 없이 어떤 동창이나 선생에 대한 실없는 이야기들에 바로 폭소가 터지고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늘 유쾌하고 반가운 일이다. 타지에서 만난 고향 친구보다 반가운 존재가 있을까. 각자 서 있는 위치는 다를지라도 "너도 비슷한 고민들을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큰 위로를 얻는다.


하지만 그 동시에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갈라져 있던 삶의 경로가 가져오는 차이 또한 무시할 수 없다. "2000년대 후반 국제학교 졸업생"이라는 매우 작고 특수한 집단 속에서도 그렇다. 서로가 그 시간 동안 겪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 마주친 여러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책과 영화와 여행을 통해서 축적된 각자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협소했는지 다시금 느끼게 된다.


공통점이 많을수록 미세한 차이도 크게 다가오는 법이지만,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본다. 한 사람은 한 권의 책이라는 비유도 있지만, 우리는 각자 서로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이 아닐까. 대화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보인 세상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조금은 더 넓은 세상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곧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한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다양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면 대화의 주제는 한정되어 있을 것이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야도 좁아질 수 있다.


더 넓은 세상을 본 인생이 그렇지 못한 인생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한 통찰과 인생에 대한 지혜가 항상 경험의 폭과 깊이에 비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를 통해서 타인에게 보이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라는 질문을 되묻게 된다.


먼지가 잔뜩 쌓인 창을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어둡고 무력한 세상을 드러내는 것인지, 아니면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더 밝고, 흥미롭고, 풍성한 세상을 공유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살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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