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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Oct 08. 2021

배심원 소환장과 오렌지 라떼

2021.10.07


이 모든 일은 7월에 시작되었다.


산타 클라라 카운티 법원에 배심원으로 소환되었다는 통지가 우편함에 찾아왔다. 카운티에 거주하는 만 18세 이상의 미국 시민권자이며,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범죄 경력이 없으면 누구나 1년에 한 번 소환될 수 있다.


이렇듯 일반 시민이 법원에 출석한 후에 배심원으로 선정되면 /형사 재판에 참여해서 판결을 내리는 제도다. 미국 헌법 수정조항 6조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히 여겨진다. 출석 명령을 거부하면 법정 모욕죄로 간주된다.


대학원에 와서까지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고질적인 ‘정치병 걸린 탓인지 조금은 기대되기도 했다. 사법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다른 배심원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시민으로서 판결을 함께 내리게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재판인데 혹시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어쩌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학교 문학 수업에서 읽었던 <Twelve Angry Men> 속의 극적인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막연한 두려움도 느껴졌다. 소환장을 받아본 것도 처음이고, 무엇보다 여름 동안 대학원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머리를 식히던 중이어서 적잖이 당황했었다.


누구나 소환장이 발부된 날부터 출석하는 시점을 최대 90 연기할  있다고 해서 10 첫째 주로 날짜를 미뤘다. 10 4일부터 8일까지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모든 일정을 비우라는 통지가 이내 도착했다.   주말인 10 2-3 중에 법원 위치와 출석 시간  자세한 내용이 전달될 예정이니, 그때 다시 웹사이트에서 정보를 확인하라는 설명도 편지에 적혀 있었다.




"출석할 준비를 하시면서 월요일 오전 11-12 사이에  페이지를 다시 확인하십시오."


지난 주말에 로그인을 하니 이렇게 안내사항이 적혀 있었다. 월요일 오전 중에 다시 확인을 하러 가니 안내사항이 바뀌어 있었다.


"출석할 준비를 하시면서 금일 오후 5 이후에  페이지를 다시 확인하십시오."


이렇듯 오전에  , 저녁에  , 매일  번씩 웹사이트를 확인하면서 일주일 내내 법원으로   있도록 항시 대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만약 배심원으로 선정이 되면 민사 재판의 경우 보통 1-2, 형사 재판의 경우 2-3주가 소요되며 재판이 끝날 때까지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는 설명도 카운티 법원의 FAQ에서 찾을  있었다.


이번주는 물론, 앞으로 적어도 열흘 동안은  동안  어떤 일정도 잡을  없게  것이다. 가능하면 미리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번거롭고 답답하기는 했지만,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재판에 참여하게 되면 법원에서 모든 배심원에게 차비와 임금을 지급하게 된다. 그렇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거나 자가용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주민은 여전히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월요일 저녁에는 다음날 오전 8 반까지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아서 옷을 차려입고 오전 8시쯤에 법원 인근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다시 보니 귀가해서 오후 5 업데이트를 기다리라는 공지가 뜨는 약간의 해프닝도 있었다. 아마도 전산 오류였던  같다. 코로나 때문에 사법 기관도 어려움을 겪는 걸까.


오늘도 11 5분쯤에 일단은 대기하라는 통보를 확인하고 남은 하루 동안 자유가 주어져서 잠시 카페에 나와 있다. 오늘 5 이후, 그리고 내일 오전 11시에도 출석 통보를 받지 않으면 출석 의무가 면제될  같다. 앞으로 1 동안은 법원에 배심원 후보자로 가게  일은 없게 되는 것이다.


면제가 되면 물론 마음이 놓이기는 하겠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남을 것 같다. 일주일 내내 일정을 비워두고 법원에 출석할 준비를 하면서 시민이 서로에게 지는 책임은 무엇인지 아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끼고 있다. (정치병 치료제 개발이 매우 시급하다.)


그래도 처음 시켜본 오렌지 라떼가 맛이 괜찮은 덕분에 기분 좋게 시작하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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