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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침반 Nov 12. 2021

우리는 모두

2021.11.11

2021.11.08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자기 몸의 세포보다 더 많은 수의 미생물을 장 속에 품고 있다. 우리는 세균으로 우글거리는 존재이고, 화학 물질로 포화된 존재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물론, 그리고 특히, 다른 사람들과도.

--- 율라 비스 (김명남 옮김), <면역에 관하여> 중




문득 "위드 코로나"라는 께름칙한 표현은 누가 생각해낸 것인지 궁금해졌다.


완전히 박멸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바이러스의 특성상, 이제는 사라지지 않고 사라질 수도 없는 코로나19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피해를 최소화하며 일상을 회복하고 삶을 이어나갈 방법을 찾기 위해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그 문구에 대한 원초적인 거부감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같이 갑시다"나 "손에 손잡고"에 담겨있는 긍정적인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미 5백만 명의 목숨을 앗았고, 그 규모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피해를 입힌 주범이랑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니. 


코로나 이전의 세상에 대한 장밋빛 환상은 없다. 하지만 <박하사탕>에서 기차를 향해 절규했던 설경구의 마지막 한 마디가 내면의 깊숙한 어딘가에서 메아리친다.


아직 코로나19로 오염되지 않았던 그 세상으로 정말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건지.




많은 사람이 흰색 3단, 4단 마스크를 사용하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마스크를 착용한다. 면으로 만든 방한용 마스크부터 수술용 마스크까지, 머리 뒤로 여러 번 묶은 스카프부터 공업용 N95까지 볼 수 있다.


이토록 다양한 형태의 마스크가 각각 코로나19 전파의 주된 경로인 '비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차단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성능 카메라를 동원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사를 접했었다.


이 기사에 실린 동영상은 우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비말을 내뿜는지, 그리고 양 옆이 얼굴 표면에 충분히 밀착되지 않은 마스크를 착용하면 얼마나 많은 비말이 새어 나가는지 숨김없이 보여준다.


그 장면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마다 미세하면서도 거대한 비말 구름에 휩싸이게 된다는 사실을, 특히 밀폐된 공간에서는 이 구름이 마치 안개처럼 오랜 시간 동안 머문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사는 이상, 어느 누구라도 완벽하게 '깨끗한'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흥미로운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자신이 머릿속에 생각하는 모든 것을 여과 없이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모니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모니터가 있다면 아무런 부끄럼 없이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가?


만약 선뜻 그럴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주어진 일에 성실히 임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면서 살아가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위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예"라고 답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그 형태는 다양하겠지만, 누구든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내면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밝히 드러나지 않았으면, 누군가가 가까이 와서 살펴보지 않았으면 하는 무언가가 아마도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마스크와 얼굴 사이로 속절없이 새어 나오는 비말의 고해상도 영상을 떠올려본다.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며 살아갈 때,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완벽하게는 감출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내면에 밝고 선하고 자랑스러운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타인에게 그러한 모습만 전달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족하고 연약한 모든 모습들도 주위에 동일하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모두 오염된 존재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바라보면서도 모두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것. 오늘도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도전이자 과제는 아닐는지.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의 조언이다.


우리는 서로 관대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무분별하고, 변하기 쉽고 실수가 많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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