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침반 Jan 01. 2023

2023

2022.12.31

2021년 12월,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전화가 온 건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1시간 후에 도착 예정인데, 아파트 건물 근처에는 트레일러를 세울 수 없으니 펜타곤 시티 쪽에 뒷길로 오겠다고 하셨다.


목소리를 들으니 월요일 오후에 팔로알토로 차를 받으러 오셨던 같은 기사님이셨다. 다른 경유지 없이 바로 오셨다고 해도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달려오신 셈이었다.


알려주신 주소로 가서 보니 이미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고정 핀 몇 개를 빼고 레버를 능숙하게 조작하시더니, 가볍게 후진 기어를 넣고 가파른 경사를 내려와서 도로 위에 사뿐히 세우셨다. 도마에서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착지한 체조선수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차를 인계받았고, 기사님은 곧바로 나머지 차량을 운송하러 어디론가 떠나셨다.


약간의 빗물자국과 먼지를 제외하면, 여름에 샌디에고의 어떤 흰색 주차장 기둥에 오른쪽 뒷문을 비빈 자국도 얄미울 정도로 그대로였다.


따로 부친 이삿짐은 아직 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산타 클라라로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 주말 동안 요세미티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밤에 캠퍼스 기숙사를 떠나 101을 타고 공항에 내려주면서 여러 친구들과 선후배와 같이 공유한 추억이 깊이 스며든 공간이 눈앞에 고스란히 도착해 있었다.


선선하고 평온했던 9월의 첫 번째 토요일 아침, 문을 닫고 운전석에 앉으니 그제야 동부로 다시 이사를 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C.S. 루이스는 주위의 친구들을 살펴보며 이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 친구의 어떤 모습들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있을 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둘이만 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셋이서 모이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서 친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타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에 응답하듯 소로우는 월든 호수로 향했고 니체는 홀로 실스마리아 주변의 자연을 몇 시간씩 걸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홀로 들여다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삶을 나누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혹은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 후회하지 않는 결정도 종종 되돌아보는 건 마찬가지다. 사실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는 표현이 조금은 더 솔직한 것 같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라는 물음과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감정 사이의 벽을 조금은 더 견고하게 쌓겠다는 결심.


별다른 고민 없이 내렸던 작은 결정들이 쌓이고 쌓여서 오래전부터 자신을 이미 어느 방향으로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작년 여름에 학교를 나오기로 결심했고, 그에 따라 이번 9월에 자리를 옮겼다. 떠나온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과 그동안 과분한 응원과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에 대한 미안함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당시 주어진 상황에서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결정이었다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학부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워싱턴에서 시작해서일까. 한 걸음 물러서서 지켜보는 관찰자의 역할보다는 반 걸음이라도 현장에 더 가까운 활동에서 의미를 찾는 게 익숙해졌던 것 같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연구자보다는 여러 사람과 얼굴을 매일 맞대는 실무자의 위치를 그때부터 선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박사과정을 졸업한다고 반드시 교수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교수가 된다 해도 현장과 학교 사이의 구분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뜻이 있고 노력을 한다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박사 논문 작업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는 학교와 현장의 차이가 크게 다가왔었다.


정작 학생들은 어떻게 기억을 할지 모르겠지만, 대학원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던 기억 중 하나는 조교로서 보낸 시간들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개인의 연구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보람 있게 다가왔었다. 특히 코로나19가 닥치고 나서 본업과는 연관이 없는 일들을 캠퍼스 안팎에서 애써 찾아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여러 사람과 직접 소통하거나, 그 결과가 누군가의 일상에 조금은 더 가까이 맞닿은 일들이었다.


"우리는 앞으로 향하며 살아야 하지만, 인생은 뒤를 돌아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대학원에서 보낸 5년의 궤적을 천천히 살펴보면, 오히려 학교에 그토록 오래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 약간은 놀랍기도 하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다시 새로움을 향해 떠나야 할 때,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찾아간다. 과거의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토닥여주고, 쓰다듬어주고, 따뜻한 밥 한술 먹인 뒤 과감히 등 떠밀어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내준다. 여러 길로 갈라진 평행우주 속 용감히 떠난 나와 용감히 남은 나, 모두를 찬양한다. 그렇게 또 한발 내딛는 연습을 한다.

---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중




인간관계에 서툴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길을 굳이 선택한 건 스스로 의미를 찾고 싶은 이기심 때문일까. 누구나 사람이 어렵다고 하겠지만, 고질적인 내향인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은 무모한 선택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내다보는 지금,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이곳에서 맺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연들 속에서 서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길.


그리고 가까이서, 멀리서 삶을 나눈 모두가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길.

매거진의 이전글 보이지 않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