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샅샅이

2024.12.31

by 나침반
2024.12.30

저녁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차고지를 막 떠난 버스에 첫 승객으로 혼자 탔다. 그다음에 서너 정거장 동안 아무도 승차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사님은 정거장마다 무심코 지나치지 않으시고 속도를 충분히 줄이면서 기다리는 사람은 없는지 어두운 거리를 조심히 살피셨다. 정거장마다 4312번 버스는 물론, 다른 노선을 기다리는 승객도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번화가에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타기 시작했다.


정거장마다 정차해서 승객을 태우는 건 버스 기사의 의무다. 하지만 비교적 인적이 드문 정거장을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지나가는 기사 분들이 대부분이다. 어느 시간대에 어느 정거장에서 승객이 보통 얼마나 타는지 경험으로 아실 테니 사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지나쳐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다. 나중에 노선의 다른 구간에서 길이 막히더라도 지체되지 않도록 미리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정거장마다 굳이 속도를 줄이시던 기사님이 기억에 남는다. 혹시 조금은 길었던 배차간격을 고려해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손님 한 명에게라도 기회를 주시고 싶었던 걸까.


내년에는 아침마다 눈을 뜨면 마주하는 하루하루를 그렇게 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는 일에 별다른 진전이 없어도, 특별한 일정이 없어도 하루를 무심코 지나치지 않는 것.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한 발씩 꾸준히 나아가면서도 혹시 마주칠 어떤 순간이나 인연에 문을 닫지는 않는 것. 윤하가 '포인트 니모'에서 노래하듯 "잊지 말아야 할 건, 소중히 여겨야 할 건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 사랑"이니, "지나는 길 모두 샅샅이 살피며" 걸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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