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침반 May 28. 2021

대학원 4년차 단상: 카페는 주유소다

2019.07.28

#1. 눈을 뜨면 “내가 [4년차]라니”라는 생각부터 드는 요즘, 어김없이 시동을 걸기 위해 커피를 들이키며 하루를 시작한다. 가까스로 시동이 걸려서 액셀을 힘차게 밟으면 중립 기어로 고정되어 있는 탓에 엔진만 비명을 지르고 차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가끔은 주유소가 문제인가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다른 카페를 찾아 나서서 프리미엄 휘발유를 투입하는 사치를 부려보지만 역시 결과는 매한가지다. 돈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2. 논문 주제를 들고 가서 “이런 문제를 대신 연구해보지 않겠니”라는 조언이 마치 “저기 수평선 너머 신대륙이 있단다!”라는 말로 들릴 때가 있다. 정치학은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있던 학문이니 정말 새로운 주제는 사실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별을 보며 항로를 점검하며 탐험하던 항해사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하면서 들뜬 마음을 품고 관련 논문을 검색하다 보면 어느새 수평선은 커녕 뗏목을 지을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잘 찾아보면 땅에 떨어진 커피 열매라도 있을려나.


#3. 한동안 냉부를 챙겨보던 때, 텅 빈 냉장고를 바라보며 당혹스러워하는 셰프들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무리 유능한 요리사도 재료가 빈약하거나 혹은 조리 기구가 단순하면 감동을 주는 음식을 창조하기는 힘들다. 머리 속에 들은 것이 있어야 뭐라도 지지고 볶고 하면서 만들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주방을 이리저리 찾다보면 계란과 기름, 그리고 낡은 프라이팬만 보이는 듯 싶다. 나중에 흡사 고든 램지의 표정과 말투로 “그래도 너무 태우지는 않았네”라는 말을 들으며 계란 하나를 부치고 졸업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난 사실 적당히 바삭한 계란후라이가 맛있어”라는 영혼없는 칭찬은 기대하기 힘들다.


#4. 뚜렷한 진전이 보이지 않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흔히 한다. 초심을 별로 믿지 않는 편이다. 순수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모르는 사이에 축적된 고민과 경험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초심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은 사실 실제로 가졌었던 초심보다도 훨씬 다듬어진 무언가일 것이다.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고,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환상에 자신의 모습이 부합하지 않는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5. 예전에 대학원 유학 생활을 하셨던 한 분에게 “대학원생이 연구를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공부가 일상의 전부가 되지 않게 하라”고 해주셨던 충고가 종종 떠오른다. 물론 인생의 매 순간을 연구에 바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낼 수도 있다. 전부가 될 필요가 없으니 극히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다. 하지만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홀로 연구에 매진하며 보낼 자신은 없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면, 먼저 한 사람으로서 건강하고 편안하지 못하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지키며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6. “하라는 연구는 안 하고”라는 준엄한 경고가 하늘로부터 울려퍼져서 곧 받은편지함에 어떤 메세지로 나타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함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적당한 긴장감과 지나치지 않은 목표의식은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고, 매일 매일의 경로를 GPS처럼 뚜렷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욕심은 내려놓으면 좋지 않을까. 본분을 잊지 않되 그에 매몰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7. "Nothing that is worth doing can be achieved in our lifetime; therefore we must be saved by hope. Nothing which is true or beautiful or good makes complete sense in any immediate context of history; therefore we must be saved by faith. Nothing we do, however virtuous, can be accomplished alone; therefore we must be saved by love. No virtuous act is quite as virtuous from the standpoint of our friend or foe as from our own standpoint. Therefore we must be saved by that final form of love, which is forgiveness.”

- Reinhold Niebuhr


#8. 내일 세상이 끝나더라도 한 잔의 커피를 내리며 아침을 시작할 것이다. 그래야 어디로든 갈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으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