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기 우주인의 첫 폭풍

아픈 딸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배신

by 북극성
우주기지 밖에서 처음 겪는 아픔, 엄마 품에서 겨우 숨을 고르는 작은 우주인.



내 아이의 첫 독감은
열 때문이 아니라 주사 바늘 때문에 더 무서웠다.



병원에서 코로나 확진을 받고 돌아온 날 밤,
체온계 숫자가 38도를 넘겼다.
그때도 물론 불안했는데,
진짜 공포는 그다음 날, 병원에서 시작됐다.



작은 팔 위로 고무줄이 감기고,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고,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말한다.

“혈관이 잘 안 잡혀요.”



머리로는 이해했다.
아직 너무 어려서,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혈관 찾기 힘들 수 있다는 걸.


그런데 이해와는 별개로,
가슴 한쪽에서 이런 마음이 올라왔다.

‘빨리 끝나면 좋겠다…’




그리고 곧 채아 인생 최대 음량의 울음이 터졌다.

작은 몸이 뒤틀릴 만큼 우는 걸 눈앞에서 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였다.


“엄마가 잡고 있어 주세요.”


나는 그 말 한마디에,
아이의 두 팔을 꽉 붙들었다.
움직이면 더 아프니까,
더 깊게 찔릴 수 있으니까.


아이의 비명소리가 진료실을 채운 그 순간,
내가 제일 무서웠던 건
바이러스도, 열도 아니었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직접 아이를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


내 딸은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
더 아픈 상황에 가만히 묶어두는 일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문장이 하나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픈 딸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배신이다.



간호사가 바늘을 꺼내 들 때마다,
나는 아이 팔의 떨림과
내 손의 힘을 동시에 느꼈다.
이 울음이 빨리 끝나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지금만큼은 이 울음이
더 길어지도록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 모순이 너무 싫었다.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바라만 보는 것도 고통인데,

고통스러운 상황을 ‘유지하는 손’이 나라는 게 더 싫었다.



몇 번을 찔러도
혈관은 숨어버렸다.
결국 수액은 포기하고
약만 타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다.




아픈 우주인을 지키다 지쳐 침대에 쓰러진 아빠 우주인과, 그 곁에서 깊이 잠든 작은 우주인.



집에 돌아왔을 때,
채아는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분수토를 하던 아이와
손을 비틀며 울던 아이와
지금 이 조용한 얼굴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대신, 남편이 쓰러졌다.


38도 넘는 열로 버티던 아빠 우주인은

기력이 떨어져 침대에 기대앉았다.

어제부터 쌓인 열과 긴장과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무너진 순간이었다.



우주인의 아픔은
아빠 우주인도,
평안했던 우주기지도,
조용히 불 밝히던 북극성도
한 번에 흔들어 놓았다.




그날 밤,
나는 엄마로서의 공포가 어떤 얼굴인지 처음 알았다.



‘혹시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이런 감각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대신 아파줄 수 없구나.”


“내가 아무리 잡고 있어도,
고통은 이 아이 몸을 통과해서 지나가야만 끝나는구나.”




내 딸도,

독감이라는 큰 고통을 처음 겪었다.


살다 보면
건강, 진로, 학업, 인간관계…
수많은 고비들이 찾아올 거다.

그때마다 나는,
아마 오늘과 비슷한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겠지.



‘내가 막아줄 수 없는 고통이 또 하나 시작됐구나.’


‘그래도 잘 견뎌줬으면 좋겠다.’




그날,
나는 딸이 대견했다.
그 작은 몸으로,
인생의 첫 큰 폭풍을 통과해 줬으니까.




아이가 아픈 걸 보고 있으면, 내 안에는 항상 두 감정이 같이 산다.


‘너무 무섭다’는 마음과,


‘그래도 이 순간은 지나갈 거야’라는 덤덤함.




아마 그 두 감정을 동시에 품고 버티는 사람이
엄마라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아기 우주인의 첫 폭풍은 그렇게 지나갔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건
몸에 난 흉터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새겨진 한 문장이었다.



“이 아이의 고통을 대신 가져갈 순 없지만,
끝까지 옆에서 버티는 사람은 될 수 있다.”


열은 내렸지만, 내 걱정은 아직 내려갈 곳을 못 찾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열이 나는 아이를 볼 때마다
그 병원 진료실과
작은 팔을 잡고 있던 내 손을 함께 떠올린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한다.



“그래, 채아야.
폭풍은 앞으로도 많이 오겠지만,
우리 우주기지는 이미 첫 번째를 통과한 집이야.”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