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밤

Black

by Lunar G

사연을 위한 만남이 있다. 길 위의 사람들에게서 가슴 묵직한 울림을 들을 때가 있다. 우연한 마주침의 여운이 깊이 남겨지는 순간이 있다. 귀를 열고 있었을 뿐인데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던 사람들. 아프고, 놀랍고, 쓰린 그들의 말이 심장을 파고든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다들 주어진 시련을 감당하며 덤덤하게 삶을 마주해가고 있구나 하고. 그리고는 내 인생만 왜 이렇게 버겁냐고 했던 교만과 나태를 반성한다.

그들의 사연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은 쓰라림을 느낀 적이 적지 않다. 살을 에는 추위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삼키고, 울분을 식히고, 다짐을 거듭했던 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날 밤도 그중 하루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녀와 맥주를 사들고 해변에 앉았던 저녁, 여행 마지막 날이 아쉬웠다. 만난 지 이틀째였으니 대화는 여행지에 대한 것이 전부였지만 낯선 곳이 빚어내는 생소함 때문인지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떠들고 웃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웃고 즐기다가 비행기 시간에 맞춰 떠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느 가수의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까만’ 그 밤에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내려놓았다.

서른 전에 받은 암 수술과 항암치료, 휴직과 강제퇴직에 이르기까지의 사연이 밤을 채웠다. 암 수술 직후 퇴사를 요하며 병원을 찾은 동료들과 해결되지 않은 퇴직금 문제와 회사와의 지난한 싸움. 젊음을 다해 일했던 그 큰 회사는 벼랑 끝에 이른 그녀의 등을 매몰차게 밀쳤다. 그런 일에 익숙한 듯 회사는 능숙하게 변호사를 선임한다는 말을 하고, 퇴직금 액수를 말하고, 앞으로의 그녀의 거취를 입에 올렸다. 단단한 방패인 줄 알았던 회사가 부품을 바꾸듯 그녀를 밖으로 내쳤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을까. 거기 들어가려고 왜 그렇게 애썼을까.

내가 말했다.

다들 그래야 한다니까. 그게 잘 사는 거라고 하니까.

침묵이 지나가더니 항암 치료 후 내내 쉬었다는 말이 귀를 두드리고 들어왔다. 뒤이어 쉴 수밖에 없는 몸에 충실했다고 했는 말이 들렸다. 암 발병 5년 후의 완치 판정과 여행. 홀로서기를 다짐하는 그녀의 첫 여행의 길동무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했던 까만 밤이었다.

그 밤이 가슴에 콕 박혀있다. 앞이 까매진 청년의 눈에 재를 뿌리는 큰 손과, 그 손에 힘을 쥐어주는 보이지 않는 더 큰 손과, 갈 곳 잃고 서성이는 이 나라의 미래라는 청년들과. 꿈꾸는 이들의 앞날이 검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에 충실할 줄 아는 사람들의 밤이 더는 눈물로 얼룩지지 않으면 좋겠다.

Starry Night Over the Rhone_Vincent van Gogh.jpg Starry Night Over the Rhone_Vincent van Gogh

스침이 가져다주는 만남에 더 귀를 열려고 한다. 말이 머물다 갈 수 있는 숲이 되어 주려한다. 그게 빈손 인 내가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위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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