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나간 사람처럼 글을 뱉어내고 있다. 이것만 붙들고 있다가는 고사(枯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존의 위기를 느꼈던 작년 어느 날, 미뤄둔 일을 해결하기 위해 낯선 곳에 발을 내디뎠다. 그 선택이 내 일상을 뒤틀고, 계획을 허물고, 지독한 혼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하지 못한 채 미래를 위한답시고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준비해두겠노라며 나를 잠시 벗어나 있었다.
해야 할 일을 만들어가는 데 익숙해진 내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하나둘 주어졌다. 만남을 끌어가던 내게 휩쓸리는 모임이 늘어났다. 기한 내에 끝내야 할 일을 허둥지둥 겨우 해내는가 하면 그마저 못해 포기해버리는 일도 생겼다. 인생의 거대한 그림은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해도 일상마저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게 되니 선택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 선택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얻은 것은 사람이 담긴 인생이라는 책과 시간이었고 잃은 것은 물리적인 책과 말랑한 감정의 속살이었다. 전해준 위안만큼의 상처를 남기는 관계, 의도는 악의적이지 않았다 해도 감정을 소진하게 하는 말들,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으면 내가 다치게 될 거라는 위협적인 구조. 그런 것들을 경험하고 또 넘어다보며 일 년을 지나왔다.
의자 하나를 가운데 두고 그것을 차지하게 만드는 편협한 놀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알 수 없는 놀이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단지 의자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제 살 뜯어먹기 같은 그 놀이에 동조하라는 말이 나를 맥 빠지게 했다. 경쟁체제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개개인의 특성과 무관하게 노골적으로 줄을 세우고 그로 인해 존엄까지 말살하려는, 보이지 않는 힘의 강압에 동조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데 왜 나를 재단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인가. 나는 그 싸움에 동조한 적이 없는데 왜 나를 당신들과 같은 색으로 물들이려 하는가. 왜 나를 그대들의 용도에 맞춰 이용하려 하는가. 왜 이 유치한 싸움에 반기를 드는 자는 없는가. 왜 어느 누구도 괴물 같은 저 의자를 치워버릴 생각은 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의문 속에 1년을 보냈다.
나는 그대들과 다르다, 그 유치한 줄 세우기에 끼어들지 않겠다, 나는 나로서 서겠다는 마음으로 버틴 시간을 거쳐와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서로를 뜯고 할퀴는 데 혈안이 되었던 그대들을 본다. 온몸이 벌겋게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짐승처럼 누군가를 해체하고 있는 당신들 모습 위로 겹쳐지는 이 슬픔은 대체 뭐란 말인가. 처절한 경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자가 되기 위해 영혼을 팔고 자신을 외면하는 길을 택한 그대들이 처연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야(Francisco de Goya)의 그림 <Saturno Devorando a su Hijo>를 본다. 아들이 왕위를 뺏을 거라는 신탁을 받고 자식들을 하나씩 잡아먹었다는 사투르누스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야가 말년에 건강을 잃고 일명 ‘검은 방’이라 불리는 방에 틀어박혀 그린 벽화 연작 ‘검은 그림들’ 중 하나다.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채 아들을 삼키고 있는 무아지경의 사투르누스. 아들의 등에서 떨어지는 피가 사투르누스의 검은 생을 붉게 물들였으리라. 그 자신의 과오로 아들을 잃었다는 고야의 자책이 그 그림에 깃들어 있으리라.
이 그림을 볼 때면 ‘검은 방’에 갇혀 있는 것 같은 갑갑함이 가슴을 조여 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들을 먹으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은 자리가 왕좌인 걸까.
그렇게 해서 차지한 자리가 가치가 있기는 한 걸까.
영혼을 팔아야만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자리인 걸까.
이 혹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혈육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하고 잔혹해져야 하는 걸까.
내가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내게 남긴 의도치 않은 혹은 의도한 상처들이 따끔거려 온다. 온몸이 시려 내가 남긴 것이 더 아픈지 내게 남은 것이 더 아픈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상처가 적지 않다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