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도 있어요

by Lunar G


뼈가 갈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인간관계까지 문제를 일으켜 더는 무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도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예민한 만큼 둔한 내 인내가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마감일 전에 그 일을 빨리 일단락 지어 놓고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일을 빨리 마무리하는 것 그게 너를 하루라도 빨리 만날 수 있는 길이었기에 기를 쓰고 버텼다.

그런데도 일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벚꽃이 필 때 시작한 일이 장미가 만발할 때가 되도록 뚜렷한 성과를 내보이지 않았다. 팀으로 하는 일이라 해도 내 성과를 내보여야 하는 상황이라 결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결국 홀로 고독하게 프로젝트를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하나만 풀리면 될 것 같은데 그 하나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감 기일은 다가오는데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다. 초조함이 눈덩이처럼 불어 갔다. 누가 정답이라도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 일에는 정통한 전문가라 할 사람도 없었기에 질문이 생겨도 물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벼랑 끝에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 속에서 나는 나날이 말라갔다.

별을 보고 나가 별을 보고 들어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불안으로 잠도 못 자는 날이 이어졌다. 그와 나 사이에 언어로는 채울 수 없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놓이기 시작했다. 그가 옆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말 없이 그가 밤마다 어깨를 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거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를 둘러싼 기운으로 인해 가까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끈했던 통화와 메시지가 식어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변한 게 아니었다. 삶과 사랑의 균형을 찾아가는 데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보고 싶다고 하면 당장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그가 없다는 사실, 그게 나를 힘들게 했다. 한 번도 나를 버겁게 느끼게 한 적 없는, 우리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내 마음을 식게 하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사는 게 버거워져서, 그 버거움이 사랑을 좀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못 하는 내가 한심해져 문득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무엇을 위해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어느 날, 지인에게 이대로라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르겠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지인이 너에게 뭐가 있어서 그만둘 수 있냐는 질문을 했다. A는 집안이 좋고 B는 든든한 남자친구가 있고 C는 탄탄한 뒷배가 있지만 너한테는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는 말을 했다. 뭐가 없어도 의미를 찾지 못할 것 같으면 그만두는 게 나인데 그 동료가 나를 아직 잘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무엇이 있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 가정을 꾸리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지인이 어른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생각이 났다. 그의 얼굴이 아른거려서인지 나한테도 이 세상에 한 사람 정도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당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멋진 사람이 내가 이 일을 무사히 끝내기를 매일 밤 기도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잠들지 못하는 날 위해 내내 나와 함께 밤을 지새워주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랑 때문에도 삶 때문에도 울고 싶지 않기에 웃었다. 나의 웃는 얼굴이 자기에게는 선물이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 순간 그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남의 연애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밝히고 있지 않았다. 너무 소중했기에 꼭꼭 숨겨두고 싶었다. 연애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나를 둘러싼 한 마을이 함께 연애를 하고 있는 기분으로 인해 나의 소중한 사랑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 멋진 사람이었으므로 자랑하고 싶은 마음 나에게도 이런 멋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로 우쭐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랑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을 보는 것을 애초부터 차단해 버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라는 멋진 세상을 나를 둘러싼 세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지 못해 생기는 서운함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억울하고 서운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을 번번이 그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그가 같이 할 수 있을 날을 앞당기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람 몰래 속앓이를 하고 그는 나로 인해 긴긴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던 내 프로젝트에도 첫 단추가 채워졌다. 안도의 한숨이 일었다. 모든 게 그의 덕이라며 고맙다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내가 해낸 것이라고, 시간이 걸릴 뿐 나는 훌륭히 잘 해낼 것이므로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안도의 한숨이 아니라 다음 여정을 위한 긴 호흡이라고. 내 가능성을 의심하며 불안해하는 나를 대신해 그가 나에 대한 믿음을 꼭 붙들어 주고 있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사랑받고 있음이 나에게 닿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라는 세상이 나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마음이 내 속에 콕 박혀 있었다.

Gustave Courbet_Bouquet of Flowers in a Vase.jpg Gustave Courbet_Bouquet of Flowers in a V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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