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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먼아프리카 Aug 23. 2022

현지의 텃세에 당당히 맞서다

  마을 원주민의 텃세에 못 이겨 귀농인들이 시골 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는 국내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누구나 새로운 곳에서 한 번쯤은 텃세를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도 텃세가 존재하는데 아프리카라고 예외는 아니다. 


  낯선 이방인으로서 누리는 프리미엄도 존재한다. 아프리카 현지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여행객이라면 생각보다 많은 프리미엄을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현지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야 하는 이방인의 경우라면 텃세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나 마찬가지다.


  대체로 현지 사람들은 두려움과 경계심을 가지고 이방인을 바라본다. 이방인의 행동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텃세를 부리며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원하는 걸 얻어내고자 하는 경향을 보인다. 텃세는 그러한 기저에서 나오는 방어심리가 아닌가 싶다. 외부 사람들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축소되거나 불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마다 나는 현지 사람들의 텃세를 경험했었다. 그들의 행동이 충분히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서 텃세를 또다시 겪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새로 합류하게 된 잔지바르 사무소에는 한국인 책임자가 부재중이었다. 이를 대신하여 현지인 선임 매니저인 바라카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바라카는 잔지바르 교육부뿐만 아니라 사무소에서 진행 중인 사업들의 이해관계자들과 매우 친했다. 바라카는 나에게 사무소와 관련된 모든 업무 활동을 인수인계해주었다. 사업장 가는 방법에서부터 사무소 차량 기름을 넣는 주유소 위치까지 모든 걸 하나하나 세세하게 안내해주었다. 이곳저곳을 방문하며 우리 사업과 관련된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현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로 조율하는 작업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잔지바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바라카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었다. 나 또한 바라카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바라카가 무심코 흘리는 말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바라카는 내가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공유해주었다. 하루는 바라카가 사무소에서 일하며 느낀 섭섭한 마음을 토로했다.


  ”그동안 사무소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정말 많은 일을 했어요. 사업을 수행하면서 다른 직원들도 관리하고 있고 탄자니아 지부에 수시로 결과도 보고해야 해요.“

  바라카는 내가 사무소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혼자서 갖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듣고 괜히 마음이 짠했다.


  ”바라카가 정말 고생했네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알려줘요. 내가 도움을 줄 만한 일이 있나요?“

  나는 바라카에게 물었다.


  ”한 가지 공유하고 싶은 게 있어요. 3년째 월급이 동결이에요.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 힘들어요. 내년부터라도 월급을 올려주면 좋겠어요.“

  바라카는 자신의 월급을 인상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업무는 그가 주도적으로 관리를 해왔다. 하지만 월급 인상만큼은 탄자니아 지부랑 계약서를 체결해야 하는 문제라서 바라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라카가 받는 월급을 확인해봤다. 잔지바르 기준에서 그의 월급은 상위 소득계층에 속했다. 더군다나 그의 여동생은 사무실에서 청소부로, 남동생은 운전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이 사무소에서 함께 일하는 중이었다. 


  사무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컸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할 때도 본인이 사무소를 책임지고 있는 사무소장처럼 내 앞에서 행동하기도 했다. 다른 기관 사람들과의 대외협력은 그의 차지였다. 잔지바르 교육부 관계자의 소통도 자신의 중요한 역할이라 주장했다. 나한테는 교육부와 긴밀하게 협업을 진행할 때 내부적인 행정 처리만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바라카는 한국에서 온 신입 관리자인 나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텃세를 부리고 있었다.


  사무소는 잔지바르에서 교육사업과 관련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잔지바르 교육부와 산하기관인 콰라라미디어센터가 우리의 주요 이해관계기관이었다. 콰라라미디어센터 직원들과 부임 인사차 상견례를 가졌다. 이후 추가로 몇 차례 더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를 통해 미디어 교육사업의 추진전략과 방법 그리고 향후 계획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본격적으로 협력 사업을 수행하기로 한 날, 콰라라미디어센터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갑작스레 전체 회의를 요청하는 전화였다. 나는 부랴부랴 미디어센터를 방문했다. 센터 직원들은 이미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기에 앞서 전체 회의를 요청하게 되었어요. 사업과 관련해서 우리 직원들이 당신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고 하네요. 직원들의 질문에 성실히 답을 해주면 좋겠어요.“ 

  센터장이 말문을 열었다.


  이미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전반적인 브리핑을 끝낸 나로서는 이번 회의 요청이 뜬금없었다. 그럼에도 미디어센터에서 특별히 요청한 회의이기 때문에 성실히 임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20여 명의 센터 직원들은 한 사람씩 교대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전체 예산이 10억인데 우리가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받는 성과 수당이 턱없이 적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편집국장이 갑작스레 핏대를 올리며 불만을 드러냈다. 내게 답변할 틈을 주지 않았다. 


  ”기존에 근무했던 사무소장이 제작 수당을 인상해준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당신 사무소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수당을 착복한 것이 아닌가요?“

  편집국장 옆에 있던 카메라 감독이 이어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삿대질까지 해대며 나를 무섭게 몰아쳤다. 다른 직원들을 선동하는 듯했다. 


  뜬금없이 나를 쏘아붙이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집단 공격 형태의 텃세는 처음이라 어리둥절했다. 겁이 나기도 했고 짜증도 치밀어올랐다. 복합적인 감정이 교차했다. 예전에 아프리카 오지마을에서 경험했던 텃세와 얽힌 좋지 않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었지만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미디어센터 직원들의 불만과 협박 아닌 협박에 화가 났다. 의도적으로 나를 도발하면서 나와 힘겨루기를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전에 휘말릴 수는 없었다. 그들의 공격적인 말에 날 선 반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도록 계속 듣기만 했다. 그들의 요구사항을 종합해보니 결국 미디어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성과 수당을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태도가 매우 괘씸했다. 그러나 무작정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센터 직원들이 제기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나서 현실적인 제작 수당을 반영해주기로 약속했다. 예산을 살펴보니, 일정 정도 올려줄 수 있는 여지가 보였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논의 결과를 구두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직책별 제작 수당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문서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미디어센터장과 내가 공동으로 문서에 서명하는 절차를 밟았다.


  어떤 결과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이후에도 몇몇 직원은 계속해서 몽니를 부렸다. 금액이 적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센터장과 서명한 계약서를 보여주며 최대한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수령을 끝까지 거부한 센터 직원에게는 제작 수당을 집행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사항을 무작정 들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문서로 서명한 약속을 내가 파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센터 직원들에게 계속해서 끌려다닐 게 뻔했다.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센터 직원들이 지금이라도 수당을 받겠다고 요청해왔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이번 건에 대해 수당을 재집행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한 모습을 보였다. 센터장과 내가 서명한 문서를 복사해서 센터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내가 강하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센터 직원들은 아무 말을 잇지 못했다. 


  웬만하면 현지 이해관계자들의 합리적인 요구사항은 받아주려고 노력했다. 상호 간에 합의한 내용은 존중하되 그 범위 밖으로 벗어나는 부분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정 기관이나 개인을 위해서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교육부나 산하기관들은 여러 원조 단체로부터 다양한 규모의 예산과 사업을 지원받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받게 될 금전적 이익을 먼저 생각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를 이해하고 맞춰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위한 좋은 변화를 이끌어나가는 과정이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 개발협력사업을 수행하다 보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부딪히게 된다.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는 현장에서 자칫 잘못 대응했다가는 갈등의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모두 반영할 수는 없다. 협상을 통해 상호 이익이 되는 결과를 도출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손해를 보더라도, 합의를 통해서 도출한 원칙에 기반하여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칙이 무너져 버리면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상호 간에 불필요한 갈등이 증폭된다.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일이 교착상태에 빠질 때마다 생각하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사업 수행을 통해 혜택을 받게 될 최종 수혜자인 지역주민들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현지의 텃세에 대응했다. 지역주민들이야말로 내가 현지의 강력한 텃세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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