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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숭이 Jun 21. 2020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

빈 속을 채우는 집밥의 힘

박완서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새롭게 풀어낸 고린재비네 삼형제 이야기를 아시는지. 어느날 고린재비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이 밥을 안 먹으면 죽지만, 반찬을 안 먹는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것. 그래 그 길로 장에 가서 짜디짠 굴비 한마리를 사다가 천장에 매달아 놓고 온 식구가 밥만 먹게 한다. 반찬없이 굴비 한번 쳐다보고 밥 한 술 먹기에 평생을 길들여진 고린재비네 삼형제들은 나중에는 천장에 매달린 굴비없이도 밥을 꿀떡꿀떡 잘 넘기게 되었다. 고린재비가 죽은 뒤 삼형제는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먹어본 게 없으니 먹고 싶은 것도 없던 터라 먹던대로 여전히 밥만 먹고 살았다.


세월이 흘러 첫째는 농사꾼, 둘째는 소리꾼, 셋째는 환쟁이가 되는데 하나같이 각 분야에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줄줄이 실패를 맛본다. 첫째가 기른 작물은 크기만 크고 때깔만 고왔지 도대체가 싱거워서 먹는 맛이 없다. 둘째가 풀어내는 소리는 목청도 대단하고 가락도 정확한데 도무지 흥이 나질 않으니 듣는 맛이 없다. 셋째가 그려낸 그림은 진짜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은데 가만보면 얼이 빠져 있어 보는 맛이 없다. 맛이라고는 맹숭한 밥맛밖에 모르는 삼형제는 어떤 것에도 참맛을 담아내지 못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속 빈 강정, 맹탕이다.


누군가의 몸 속에 새겨진 맛이라는 건 곧 그 사람 자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밥>이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일 뿐이고 <맛>이란 먹는 중에 느껴지는 감각일 뿐인데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는 힘이 된다는 조심스럽고 놀라운 비밀이 얼핏 싱거워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에 꽉 들어차 있다. 너무나 사소해서 너무나 소중한 것, 밥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밭의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기계식농업이 발달했다고 해도 결국 농사엔 사람 손이 무수히도 많이 간다. 버리는 것 없이 씨알 하나하나 알차게 영글기 위해서는 사람이 수시로 들여다보고 다독거려야 한다. 속이 꽉 찬 배추, 실팍한 무 같은 건 그렇게 키워진다.

사람 하나를 키워내는 것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먹을 것이 넘쳐나고,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있다고 해도 이런 것들로는 한 사람의 정서를 오롯이 채울 수 없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도마소리, 뚝배기 속 찌개가 둔탁하게 끓는 소리, 온 집안으로 고소하게 퍼지는 음식 냄새, 밥상에 올라온 색색의 먹거리들, 젓가락 끝에 저마다 다르게 감기는 식재료의 느낌, 이런 오감들이 모여 한 사람의 '속'을 이룬다.


그래서 오늘도 수고스럽게 밥을 짓고, 유난스럽게 식구들을 불러 모아 밥상 앞에 둘러앉는다. 그렇게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갖가지 생선을 갖가지 방법으로 발라 밥 위에 얹어주고, 하루 끝에 남은 시름처럼 서너장씩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오는 깻잎 끝을 지그시 잡아 떨쳐주고, 고등어는 고갈비를 먹어야 제대로 먹은 거라는 둥, 삼겹살은 미나리랑 먹어야 맛있다는 둥 집집마다의 먹는 방법도 전수해가면서, 빈 속을 채운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그 사람의 정서가 되고 됨됨이가 되고 밥심이 된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는 것, 한 사람의 근간을 이루는 일이다.



***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글작가는 작년에 다른 계정(@날필)으로 우리가한식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본 계정(@날숭이)은 그림작가의 것입니다. 작년 수상자는 당선이 불가하다는 공모전 규정에 따라 일러스트 부문으로 접수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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