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맛집, 시댁
엄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독실한'이라는 말 뒤에는 어쩐지 '크리스천'이 붙어야 할 것 같은데 한낱 형용사를 살리자고 울엄마를 개종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지극한 부처사랑을 빼놓고는 엄마와 엄마의 생애를 논할 수 없다. 그 사랑을 스스로 증명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엄마는 오신채를 먹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한 개인의 신념이 담긴 꽤 멋진 문장이 완성된다. 문제는 엄마가 모든 음식에 오신채를 넣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오신채, 불교에서 금하는 다섯가지 식재료. 마늘, 파, 부추, 달래, 양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특히 한국음식)은 맛이 없다. '맛이 없어서 도저히 못 먹겠다'라는 일반적 의미의 맛없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미(無味), 맛이 없다. 뭔가 입안을 채웠다가 감흥없이 사라진다. 내게 음식맛이란 곧 식감이었다. 채소는 아삭아삭한 맛, 고기는 질깃질깃한 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오신채를 일절 쓰지 않은 것은 아니고 본인이 먹을 음식을 따로 덜어놓은 뒤, 마지막 단계에서 파와 마늘 등을 추가해서 가족들에게 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본연의 맛을 우려낼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한 파와 마늘은 요리에서 겉돌기 일쑤였고 그마저도 양념이 주가 되는 '김치'같은 음식엔 쓸 수 없는 방법이었다.
엄마는 고기반찬도 잘 만들지 않았는데 '본인이 먹지 않는 음식이어서'라기보다는 본인이 먹지 못하기 때문에 맛을 낼 자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기 대신 엄마가 가족들의 단백질공급원으로 선택한 것은 계란이었다. 소금을 뿌려서 굽는 것만으로도 다른 집의 것과 유사한 맛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재료, 엄마의 동아줄. 덕분에 우리 삼남매의 도시락반찬은 사시사철 계란반찬이었다. 계란후라이,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장조림....친구들이 농담삼아 "너네 집 양계장 하냐?"고 물어왔을 정도로 엄마의 계란사랑은 대단했다.
심지어 우리집은 외식도 잘 하지 않았다. 요즘에나 식문화에서도 다양성이 존중받기 시작했지, 불과 이십년 전까지만 해도 식당에서 특정재료를 빼달라는 요구는 '진상'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하물며 오신채를 빼달라는 요구가 일반식당 입장에서 가당키나 하겠는가. 아무리 메뉴를 고르고 고른들 오신채를 걸러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놓고 짜증내는 식당주인과 아빠가 언성을 높인 뒤로는 가족 중 누구도 쉽게 '오늘은 간단하게 밖에서 먹자'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우리에게 외식은 집밥보다 복잡하고 긴장되는 것이었으니까. 외식이 즐거운 기억으로 이어진 날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외식이 썩 내키지 않는다.
싫으나 좋으나 우리에겐 사찰음식같은 엄마의 집밥이 최선이었고 모두가 묵묵히 각자의 밥그릇을 비워냈다. 평이한 삶이 드라마가 될 수 없듯 단짠 없는 밥상 또한 참 구미가 당기지 않았지만 나는 받아들였다. 밥이란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이며 밥맛이란 그저 씹는 맛이려니, 그렇게 엄마의 밥을 먹으며 자라 식욕없는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먹는 것 말고도 세상엔 욕심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채워야 할 식욕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스물 일곱 살 되던 늦가을, 남자친구네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말이 "저녁이나 먹으러 오라"지, 사실상 내가 저녁상에 오르는 자리가 될 것이기에 나는 적잖이 신경을 썼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입을 일 없는 H라인 스커트까지 단정하게 차려입고 남자친구네 거실에 들어섰을 때 세상에나, 그날 그 밥상을 보기 전까지 상다리가 부러진다는 말은 책 속에서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집에서 다 만들 수가 있나? 출장부페라도 부르신 건가? 온갖 생각을 하며 홀린 듯 수저를 들었다. 국물부터 한 숟갈 떴다. 이건 뭐지. 지름 한 뼘짜리 국그릇안에 우주가 담겨있었다. 찬이 많아서 국은 안 끓일까 하다가 숟가락이나 적시라고 간단하게 끓였다는 국물에 무슨 조화를 부리면 온 세상의 맛이 스며들 수 있을까? 집에서 끓인 국이 이런 맛이 난다고? 지금 '예비시댁'이 문제가 아니다. 이 집이야 앞으로 시댁이 될지, 전남친 집이 될지 알 수 없었지만 눈 앞에 놓인 밥상은 곧 과거가 되어버리고 말 현실이었다. 이 밥상에 한 치의 아쉬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치 도장깨기를 하듯이 앞에 놓인 반찬접시들을 하나하나 비워나가다가 마침내 간장게장이 눈에 들어왔다. 간장게장은 손을 쓰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는 음식이다. 아들의 여자친구를 맞는 밥상에 간장게장을 올려두신 건, 딱히 그 맛을 선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가짓수를 채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남자친구 어머니의 의도야 어찌됐든간에 나는 그것을 집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달큰한 듯 짭짤하고 새콤하게 맵싸한, 뒷골에 새겨지는 짜릿한 맛. 체면과 첫인상 같은 건 개나 줘버려야 마땅한 맛. 이 맛 앞에 예비시댁이 대수인가. 그 맛이 내 모든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다. 게딱지와 씹다 뱉은 게다리가 내 앞으로 쌓여갔다.
맹렬한 나의 기세에 처음엔 조금 당황하시는가 싶던 남자친구 아버지도 나중엔 기예를 보는 어르신들처럼 '아이구 잘 먹는다'를 연발하며 좋아라하셨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친구는 묵묵히 나를 민망해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남자친구 어머니는 앞치마를 맨 채로 쉴 새 없이 밥상과 부엌 사이를 오가며 식구들의 밥수발을 들고 계셨다. 잠깐 와서 앉으시는가 싶다가도 다시 무언가를 가지러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그 한복판에서 나는 끊임없이 게장을 훑고 김치를 아삭거리고 국물을 들이켰다.
'밥'이란 그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먹는 거라고, '맛'이란 씹는 맛이 8할 이상이라고, 삼십여년에 걸쳐 막아온 식탐의 둑이 남자친구네에 첫 인사를 드리러 간 저녁상에서 터져버릴 줄이야. 꼭 남자친구네 집밥이 맛있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그때 그 남자친구는 남편이 됐다. 지금도 양가를 오갈 때마다 나는 양 극단을 오가는 밥상을 마주하게 된다.
달지도 짜지도 맵지도 시지도 않은 엄마의 집밥.
이 세상의 맛이란 맛은 한데 모아놓은 것 같은 시어머니의 집밥.
혀는 한쪽으로 기우는데 팔이 자꾸만 안쪽으로 굽어 판단을 흐린다.
두 어머니의 집밥에 똑같이 담겨있는 건 가족을 위한 고뇌의 무게라고, 그러니 그 정성에는 경중이 없다고, 엄마의 딸로서 슬쩍 엄마의 편을 들어본다. 그러다가도 시어머니의 간장게장을 떠올리면 또다시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고 마는 것이다.
그야말로 절간같던 나의 집밥역사에 강렬하게 사무친 속세의 맛.
인생맛집, 시댁.
***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글작가는 작년에 다른 계정(@날필)으로 우리가한식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본 계정(@날숭이)은 그림작가의 것입니다. 작년 수상자는 당선이 불가하다는 공모전 규정에 따라 일러스트 부문으로 접수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