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살고 있는 큰언니의 딸인 조카가 8살 때 경찰 제복을 입은 내 모습을 그려서 선물해준 적이 있다.
정정하겠다.
강압에 못 이겨 내 모습을 그려준 적이 있다.
휴가를 얻어 제주도에 간 나(서울 경찰)는 조카를 만나자마자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이모 사진이지.”
파출소 직원이 휴대전화(그 시절엔 스마트폰이 없었다)로 찍어준 내 전신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나는 상가 앞 인도에 서서 입을 헤~~ 벌린 채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무얼 하다가 찍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꼬질꼬질한 행색을 보아하니 밤을 새운 다음 날 새벽,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도 없고 해서 기념 삼아 찍었을 것이다. 사진이 마음에 든 나는 제주도 갈 때 챙기려고 미리 사진관에 들려 현상해뒀었다.
“이 사진을 보면서 그림 좀 그려주라”
서울에서 온 경찰 이모가 어린 조카에게 자기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뭘까?
자랑하려고.
우리 조카가 날 엄청 좋아하는데 고향에 갔더니 짠~하고 날 그린 그림을 선물해주더라.. 고 지인들에게 뻥 좀 치고 싶었다.
당연히 조카에겐 이러한 사악한 의도를 꽁꽁 숨긴 채 “이모는 네가 그려준 멋진 그림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래”라고 둘러댔다. 그림 옆엔 “순경 이모”라는 글자를 꼭 적어달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조카가 그려준 내 모습
이모나 삼촌을 경찰로 둔 아이들은 보통 이러한 혈연관계를 자랑거리로 삼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에게, 친구는 아니지만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는 또래 아이들에게 외친다.
“우리 이모 경찰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보다 더 부러운 자랑거리가 있었다.
“우리 이모 서울 산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TV에 나오는 대통령과 연예인들이 살고 있다는 낭만의 도시 서울. 친척 중에 누군가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친구는 뭔가 멋져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누구인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경찰’ 이모 아닌가?
이 정도면 충분히 놀이터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스펙(?)일 텐데 애석하게도 우리 조카는 그런 보통 아이 축에 속하지 않았다.
명절 때나 가끔 마주치는 ‘서울’ 이모에게 경찰 생활은 어떤지, 서울 생활은 어떤지 한 번도, 아~~ 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대학생이 된 조카에게 은근슬쩍 물어보았다.
나 : 너 내 SNS 알아?
조카 : 응
나 : 팔로우했냐?
조카 : 아니
나 : ㄹ(ㅡ.ㅡㄹ)
조카 : 아참, 나도 몰랐는데 내 친구가 이모 팔로워더라?
나 : ᕕ( ᐛ )ᕗ ᕕ( ᐕ )ᕗ
어쨌든 해피엔딩.
세상엔 ‘이모 사람’ 자체에 일도 관심 없는 조카도 많다. 조카가 그려준 그림을 받고 싶으면 알아서 그려주지 않을까.. 기다리지 말고 나처럼 그려달라고 말해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