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뽈작가 Feb 01. 2021

한 경찰관의 엉뚱한 상상,
행복 신고는 112


저기.. 내일 아침에 퇴근하고..
좀 맞아볼까 해


순경 시절, 야간 순찰을 하려고 순찰차에 타자마자 운전석에 앉은 조장이 꺼낸 말이다. 오른쪽 검지로 자신의 미간에 깊게 새겨진 11자를 가리키면서. 건장한 체구를 지닌 40대 중반의 그는 남부끄러웠는지 내가 "아.. 보톡스요?"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열변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미간 주름은 찡그리는 습관 때문에 생기는 거라던데, 이게 다 경찰 생활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생긴 주름이야. 우리가 웃을 일이 어딨어? 매일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잖아. 112 신고 출동 가서 헤벌쭉 거릴 수 있겠냐고!" 그 순간 조장님 이마의 11 자는 1자가 추가되어 내 천(川) 자가 되었고, 이러다 보톡스고 뭐고 공상 처리부터 하러 갈 기세였다.


경찰 임용된 지 1년이 되지 않은 나였지만 조장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경찰은 일반인보다 어두운 환경에 많이 노출되는 탓에 심적 고통이 크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던 참이었다. 주로 교통사고, 자살, 싸움, 절도 등 심각한 현장으로 출동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일부 심리학자들은 '표정'이 '감정'에 영향을 준다는데,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자주 짓는 경찰은 부정적인 감정을 갖기 쉽겠지? 나라고 피해 갈 수 있을까? '친절한 경찰'이 되겠다던 나의 감정은 점점 메말라갈 것이고... 퇴직 후 나이가 들면 분명 '욕쟁이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게 될 것이다. 헉.

ⓒ뽈작가

그렇게 신성(?) 한 순찰차 안에서 엄숙하게 보톡스 선언을 한 조장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기'라고 외쳤던 복두장이처럼 후련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시동을 걸었다. 순간이었지만, 그의 미간 주름이 사라졌다.


부우웅...

그런데 만일...


부우웅...

112 신고가...


부부웅...

'범죄 신고 112'가 아니라 '행복 신고 112'이면 어떨까?

경찰이 행복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면?


ⓒ뽈작가



행복 신고는 112?


112 신고 센터 : 경찰입니다.

신고자 1 : 저 대학에 합격했어요! 행복해요~

신고자 2 : 방금 제 아내가 출산했어요! 행복해요~

신고자 3 : 아버지 수술이 잘 끝났어요! 행복해요~


112 신고 센터 : 대학 합격 신고가 접수됐음, 출동 바람.

112 신고 센터 : 아내 출산 신고가 접수됐음, 출동 바람.

112 신고 센터 : 부친 수술 성공 신고가 접수됐음, 출동 바람.


위이잉~~~~


112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들은...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우리 경찰도 행복해요~~" 노래를 부르며 훌라춤을 추겠지?

ⓒ뽈작가

크크크크.. 무도武道 훈련 대신 무도舞蹈 훈련을 받게 되겠군. 경찰공무원 임용 시험 과목도 바뀌겠지?

※ 경찰은 정기적으로 무도 훈련을 받는다.


엉뚱하지만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던 나는 한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신고가 폭주하면 어쩌지?

112 신고를 해야 할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지 하나하나 따져봤더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변비에서 탈출했어요", "TV 리모컨을 드디어 찾았어요", "줄넘기 20개를 넘겼어요!" 이 모든 게 행복한 순간이지 않은가? '다이어트 성공'만 해도 "500g이 빠졌어요""1kg이 빠졌어요", "2kg이 빠졌어요" 등 경우의 수가 무진장 많다. 이 모두가 허위 신고라고 할 수 없으니 신고를 접수한 112 신고 센터는 출동 명령을 내릴 것이고, 경찰들은 엄청 바빠질 것이다.


모든 신고를 처리할 수 있는 경찰 인력이 모자라 출동 시간이 지연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해 여기저기서 항의가 빗발쳐 정부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겠지. '112 신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대국민 발표를 할 것이다. "국민 여러분. 우리 정부가 각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행복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 단계별로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또 당첨은 10, 취업 성공은 5, 변비 해결은 1이지요. 5단계부터 10단계까지 해당되는 행복에 대해서만 112 신고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의 정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같은 경험이라도 사람마다 느끼고 받아들이는 행복의 크기는 다르다. 누구에겐 취업 성공이 로또 당첨보다 큰 행복이다. 초고도비만인에게 1kg 감량은 보통 사람보다 덜 행복하게 느껴진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행복은 크기만 다를 뿐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파랑새는 가까이에 있구나

엉뚱한 상상 끝에 다다른 건 이것이다. 행복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구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한 순간은 도처에 널려있구나.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수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행복 전문가들은 일상 속에서 작지만 행복한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하라고 외친다. 주변인들에게 웃으며 인사하세요!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고 보니 우리 경찰들의 일상도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다. 신고 처리가 끝날 때마다 "고맙습니다"라며 울먹이는 피해자, "수고 많으십니다"라고 인사해 주는 운전자들, 그리고 "파이팅" 응원해 주는 경찰 동료들 덕분에 보람을 느낀다. 행복을 느낀다. 무엇보다 "오늘도 무탈 없이 잘 처리했어. 이 맛에 경찰 하는 거지!"라고 칭찬해 주는 나 자신이 있기에 멈추지 않고 그 어두운 112 신고 현장으로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파랑새와 함께.


ⓒ뽈작가
작가의 이전글 레시피에 담긴 친정 엄마의 생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