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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은수 Mar 07. 2018

사랑이란 서로의 상처를 데리고 사는 일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문학과지성사, 2018)


너에게는 그림자 애인이 있지

나에게는 애인의 그림자가 짙어

구석에서 더 소극적인 현재가 되고 

한 번의 깊은 잠을 위하여 취침약을 모아 둔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중에서


황혜경 시들은 ‘이후’에 일어난 일들의 서술이다. 

무엇 이후일까. 당신(너)의 부재 이후다. 

당신이 곁에 없기에 나는 위축되고,

당신이 곁에 없기에 나는 잠들지 못한다.


그런데 당신은 없지만 없지 않다. 

계속 곁에 있다.

당신의 없음은 소실이 아니라 

여전한 현실이다.

지나간 것이 과거에 있지 않고 

현재에도 함께 있다. 


거울 앞에서 너는 무슨 생각을 하니? 처음에 나는 나를 생각하다가 너를 생각해 너는? 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깃든 너를 바라봐 

― 「베란다 B」 중에서


너는 없는데 계속 나하고 있다는 엄연함이 

부재를 현재로 데려와 

곰곰이 생각하는 언어를 일으킨다.

그리하여 화자는 “나에게 깃든 너”로 얼룩덜룩한

“말 못할 겹겹의 흉부”를 가지고 있다.

지나갔지만 지나가지 않은, 

나와 하나로 섞여서 

도무지 과거가 될 수 없는 것들로 인해

화자는 상처입고 슬퍼한다.


지금의 너는 나의 상처가 섞인 혼용어로 존재한다고 쓰는 그녀를 훔쳐보았고 그것이 너를 너로 사랑하지 못하는 너의 슬픔이라고 읽었다 나의 슬픔에도 대입해 보았고

― 「이후의 서술」 중에서


화자에게 너는 나의 상처를 데리고 사는 존재다.

나의 상처를 데리고 있기에

너는 너로만 존재하지 못하는 슬픔에 사로잡힌다.

나 역시 마찬가지.

그렇다면 사랑이란 

서로의 상처를 데리고 사는 일이다.

아마도 이 상처는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나와 너에서 ‘우리’로 나아가는 길이 거기에 있다..

언어의 이 난해한 배열들은

아마도 그 길의 험난함을 형태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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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는데, 

황혜경의 시집을 훑어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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