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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Nov 07. 2019

낯설지 않았다

현실에 눈감는 모든 남성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왔다. 한국 영화를 극장에서 좀체 보지 않는 편이지만, 그래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원작은 내게 그리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소설을 좋아하는 입장에서는 뭐랄까, 어설픈 계몽서처럼 보이는 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관에 가야할 이유가 더 많았다. 일단 책 <82년생 김지영>이 대한민국 사회에 가져온 파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었다. 대통령 후보들이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모 국회의원은 의원 300명에게 사비로 이 책을 사서 돌리기도 했다. 그간 우수한 페미니즘 입문-학술서도 많았고, 의미있는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도 많았지만 이처럼 쉽게 여론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에 비례해 반발 역시 엄청났지만. 한편으로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조리돌림 당하는 유명인들도 있었다. 레드벨벳의 아이린은 이 책을 읽었다고 밝힌 이후 악플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정유미 역시 김지영 역할을 맡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인스타그램에 악플러들이 몰려와 비난을 쏟아냈다. 당시 인턴기자로 근무하며 나는 이러한 만행들을 써내면서 "꼭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라고 결심했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영화는 꽤 인상적이었다. 일단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다. 정유미가 연기를 잘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그래도 빛이 났다. '평범한' 김지영을 연기하기에 정유미의 외모가 너무나 출중했다는 게 굳이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화장을 해야 이쁘다고 타박을 주는 장면이 특히 어이가 없었다.) 평균보다는 나은듯도 하지만 그래도 속터지는 모습을 한껏 연출한 공유도, 가족들의 연기도 몰입감이 높았다. 특히 마지막에 무너져내리는 김지영 어머니의 연기가 참 절절했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연출 방식이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조망하며 다양한 사건들을 나열한 원작의 특성상 영화로 나타내기 어려웠을텐데, 큰 문제없이 잘 나타냈다. 오히려 책으로 볼 때보다 영상으로 접하니 김지영이 경험한 사건들이 확 와닿았다. 계속 내가 살면서 보고 들은 일들을 대입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관 스크린 옆에 내가 보고 들은 사건들이 또하나의 스크린에 병렬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93년생 남성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은 어땠던가.



우리 엄마는 첫 직장으로 한국전력에 들어갔다. 대졸 공채는 아니었지만, 엄연히 정직원이었다. 90년대 초반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한국전력은 좋은 직장이었다. 그렇지만 엄마는 그 좋은 일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왔다. 당시 해태제과에 다녔던 아빠 역시 직장인이었던 관계로 우리 부모님은 주중에는 인천 이모댁에 나를 맡겨놨다가 주말에만 찾으러 가야 했다. 엄마는 그게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이모는 엄마가 나랑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되면 눈물범벅이 되곤 했다고 말했다. 결국 엄마는 95년 무렵 직장을 그만둔다. 내가 막 세살이 됐을 때였을 것이다.


나중에서야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나는 엄마에게 너무 아깝지 않냐고, 꼭 그래야만 했냐고 물었다.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직장을 그만둔 걸 후회한 적 없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선택이 바뀌진 않을 거라고. 한탄을 살짝 하시기는 했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동기들은 어디까지 승진했고~ 얼마를 버는데~ 하면서. 결과론적이지만 엄마 대신 아빠가 휴직을 하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왜냐면 아빠가 다니던 해태제과는 그 후로 4년을 채 못 버티고 망해버렸으니까. 재계순위 23위까지 기록했던 해태그룹은 IMF때 도산했다. 물론 90년대 중반에 그런 선택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019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도 공유의 육아휴직은 선택지가 아니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는 사회인이기 이전에 엄마여야 한다. 커리어를 챙길 권리는 아빠가 선점한다.


엄마는 휴직을 하고 내 동생을 연이어 낳았다. 그 사이에는 부업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중동 여성들이 두를법한 스카프(아마 차도르 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에 구슬을 박아넣는 일을 시작했다. 솜씨가 좋았는지 일이 꽤 들어왔지만 어쨌든 이것도 오래 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4년이 더 지난 99년도에야 재취업을 한다. 한국전력 자회사에서 사원을 공채 형식으로 모집했다. 엄마는 잠깐 시험 준비를 하더니 바로 합격을 했다. 본사 정직원이 자회사 계약직으로 다운그레이드된 셈이었지만 엄마는 거기에도 기뻐했다. 지금의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참 복장이 터질 노릇이지만, 당시 엄마는 오히려 근무 시간이 비교적 짧은 계약직이기에 우리를 챙겨줄 수 있다고 좋아했던 것 같다. 하긴. 엄마가 다시 일을 시작하고 놀이방에 맡겨지게 된 내가 얼마나 볼멘소리를 했는지 생각하면 그럴만도 했다.


64년생 우리 엄마의 커리어는 내가 볼 때 너무 아쉽다. 충분히 더 멋진 이력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의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20여년의 간극이 있음에도 결국 무기력하게 일을 그만두고 주부의 삶을 살아가게 된 김지영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심지어 김지영은 (서울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4년제 대학도 나왔고, 전문성을 살려 PR 회사에서 인정받는 직원이었는데도 말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언젠가는 자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도 내 커리어의 단절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책 <82년생 김지영>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 여성의 삶에서 이렇게 많은 피해 서사가 존재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일생에 한번 겪을까 말까 한 개별 사건들을 김지영에게 몰아서 투사함으로써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93년생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공감이 잘 가던데.  


극중에서 김지영이 다니는 회사의 여자화장실에 '몰카'가 설치됐음이 밝혀지는 장면이 있었다. 불법촬영물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이미 이 지점에서 범죄영상을 능동적으로 찾아봤다는 이야기다), 바로 신고하지는 못할지언정 동료 남직원들과 돌려봤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 아무리 요즘 몰카가 문제라지만 이렇게 흔한 문제일라고?...


그게 생각보다 흔하더라. 2012년, 내가 다니던 강남의 M 재수학원에서 몰카 사건이 터졌다. 재종반 담임교사가 학생들의 신체부위를 몰래 촬영하다가 덜미를 잡혔다. 해당 교사와 상담을 하다가 이상한 낌새를 챈 학생이 신고를 했고 조사 끝에 범행의 전말이 밝혀졌다. 그는 수년간 재종반 담임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신체부위를 몰래 찍어왔다. 담당과목이 수학이었고, 1:1로 질문을 할 기회가 많은 과목이었기에 피해 학생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분을 구입하고 거기에 카메라를 설치해 여자화장실에 반입을 하다가 적발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카메라를 설치했다는 사실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수업에 들어온 동료 교사들은 착잡해하며 "그렇게 신사같은 사람이 없었는데...충격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얻은 교훈이라면, 평소에 멀쩡해보이는다고 해서 성범죄자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는 것 정도였겠지.



영화에서 다룬 대부분 사건에 이런 식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82년생 '여성' 김지영과는 거리가 먼 93년생 '남성'인데도 말이다. 그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모른척 할 수 없는 소재들이었다. 낯설지 않았다. 너무나 익숙해서, 그래서 불편했다.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설정이 있다. 극중에서 김지영은 위로 언니 하나, 아래로 남동생 하나를 두고 있다. 첫째와 둘째가 여자아이고 셋째가 남자아이인 구성이다. 작가가 가족관계를 굉장히 현실적으로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당시는 남아선호사상이 뚜렷하게 남아있을 시점이라 남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애를 낳는 집들이 많았거든. 극중에서 "겨우 남자애 하나 낳아놓고" "남자애가 하나는 더 있어야" 같은 대사가 나왔다는 점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태아 성별을 미리 감별하는게 가능해졌던 90년대 초반에는 조기 낙태가 성행해 출생아 성비가 117:100 수준까지 일그러지기도 했었고.


우리 엄마는 셋째딸이다. 내게는 위로 두명의 이모가 있'었'다. 한 분은 아이를 낳다가 일찍이 돌아가셨다. 지금은 안계신 할아버지는 아들을 낳기 위해 온갖 치졸한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랬던 시대였고, 대한민국은 그런 나라였다. 그 흔적들은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다. 나는 이 영화가 낯설지 않았고, 그래서 이 영화를 현실에 눈감는 남성들에게 권하고 싶다. 이 부끄러움은 모두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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