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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incelle Feb 07. 2016

리영희를 다시 꺼내들며

그를 회상하는 시간들



#1. 2011년 11월.


조계사에 갔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수능을 막 마친 때였다. 리영희선생님의 1주기를 맞아 추모제가 있었다. 친구 두명과 함께였다. 셋 모두 정치성향이 비슷했고, 할 일이 없었으며, 수능을 망쳤다. 어머니께서 할 일도 없을텐데 친구들이랑 추모제나 같이 다녀오라 하셨다. 사실 내 나름대로는 오랜만의 얻은 여유를 알차게 보내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수능을 망친 고3은 할 말이 없고, 따라서 할 일이 없어야만 했다. 안국역에서 만나 한참을 헤매다가 겨우 도착했다. 학생은 우리 셋밖에 없었다. 민망한 마음에 맨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장례식도 아니었건만 정갈하게 차려 입은 중장년들로 가득했다.  


추도제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중간중간 손수건으로 눈물을 짜내는 어르신들이 계셨다. 식이 무르익고, 포크가수 정태춘씨가 등장했다. 서랍장 구석의 먼지낀 테이프로나 구경했던 이름이었다.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나와 시를 낭독하고, 추모사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 순간순간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개 패였다.


지금 돌이켜봐도 수능 끝난 고3들이 갈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냥 셋 모두 수능을 망쳤고, 요즘 세대에는 드물게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을 뿐. 겹치고 겹친 우연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던 기억이다. 짠했다. 망친 수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저물어 버린 시대의 등불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2.  2015년 3월.




거기, 이름이 뭐죠? 박수 주세요.




박수 세례가 쏟아진다. 당황스럽다. 왜냐고? 지금은 훈련소의 '정훈교육' 시간이니까 말이다. 논산 육군훈련소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벽제의 기동경찰훈련센터에도 정훈교육이 있다. 그 형태는 조금더 은근하고, 정교하다. 적어도 '김정일 개새끼'를 외치거나, 이승만 박사에 대한 찬양을 들을 필요는 없다.




강사는 자신을 역사학 교수라고 소개한다. 말쑥한 중년의 인텔리다. 인상만큼이나 깔끔한 언변으로 강의를 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확연히 느껴진다.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구나.  반박하고 싶은데, 어렵다. 꽤나 논리적이고 조목조목 따져든다. 게다가 교수라는 직함은 압박으로 다가온다. 일단 나보다 많이 배웠고, 깊이 아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불편한 와중에도 집중하게 만드는 화술을 갖췄다. 그 와중에 들리는 한마디가 내 폐부를 찌른다.





리영희가 제일 나쁜 놈이에요!



강사의 말이 이어진다.



"나는 정말 다 믿었다니까요? 저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랬어요. 그가 말한 것들이 전부 진실인 줄 알았어요. 그 배신감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거에요."



강당에 모인 400여명의 훈련생은 그저 꾸벅꾸벅 졸 뿐이다. 나는 그럴 수 없다. 내가 믿고 살았던 무언가를 통째로 부정하는 순간이니까. 청산유수같이 흘러오던 강연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





가계의 총 지출에서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엥겔지수'라고 한다. 만약 가계지출에서 흘러나간 책값의 비중을 재는 '책겔지수'가 있다면, 우리 집의 수치는 분명 기형적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남부럽지 않을만큼 유복한 집은 아니었지만,  인터넷 서점 고객 등급은 수년간 '플래티넘'을 유지했다. 그런 가정이었다. 그렇게 책만큼은 풍족하다 못해 넘치는 집이었다. 그 중에서도 리영희 교수의 서적은 유독 특별했다. 책들이 범람하는 서가 속에서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은 온전히 한칸을 차지했다. 일종의 성역이었다. 리영희 교수의 사인이 담긴 <자유인, 自由人>을 내보이며 가보로 물려주겠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렇기에 리영희 교수의 지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화이트보드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학자들의 이름이, 사회 이론들이 적힌다. 박현채, 안병직...  종속이론, NL 반봉건 식민사회론...




강사가 질문을 던진다.




" 이렇게 NL 반봉건 식민사회론이 득세하던 학계에서 유일하게 지조를 지킨 학교가 딱 한군데 있어요. 어디인지 아는 사람?"




내가 입에서 우물우물거린 "서강대학교"라는 답을 강사는 용케 잡아냈다.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에  "서강학파에서 연상을 해냈다"고 부연설명까지 완벽히 해낸 나는 박수갈채를 받는다. 살면서 받아 본 박수중 가장 떨떠름한 박수다.






#3.


장장 두시간에 걸친 강의가 끝나고 생활실로 복귀하자마자 공중전화로 뛰어갔다. 의경수첩을 뒤져 역사학을 전공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업중일 것 같았지만, 그런걸 가릴 만한 계제가 아니었다. 묻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한시간을 꼬박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흔들리지 마"라는 대답만이 남았다. 그래, 그렇긴 한데 말이지. 쉽지 않다고 그게.




답답한 마음에 동생에게도 전화를 했다. 강의를 진행했던 교수의 신상조사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가 추천했던 역사책들도. 강사가 뉴라이트계열의 교수라는 사실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다.  그걸로는 부족했다. 무너져 버린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리기엔 충분치 않았다.








문득 책 한권이 떠올랐다.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영화 '변호인'의 주요 아이템으로 등장한 책이였기에 언젠가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유일한 결심은 아니었다. 유시민씨가 지은 <청춘의 독서>에서도 레오폴트 랑케와의 사관을 비교하면서 소개되었던 책이다. 그때부터 대학 진학 이후의 '독서 리스트'에 조용히 담아 두었다. 역사의 가지성을 다루는 이 책이라면, 내 불안함을 진정시켜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었다.






#4. 2015년 4월.



자대에 배치를 받고 처음 읽는 책은 '그 책'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어렵다.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고 복잡한 책이다. 혼자서 독파해 내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하다. 괜히 대학가의 학회에서 스터디 교재로 쓰이는 것이 아닌가보다. 이렇게 난해한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80-90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올 수 없었을 것 같다. 결코 쉽지 않은 역사철학을 다룬 <역사란 무엇인가>가 60쇄 넘게 찍히는 나라였는데.  




마음은 급한데, 자꾸만 옆길로 샌다. 남이 요약해 준 <역사란 무엇인가>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쉽게 정답을 던져 주는 책이 아니다. 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얼핏 감이 오지만, 그것을 자기화하는 것은 녹록치 않다. 리영희 교수에 대한 믿음은 일단 흔들렸다. 그걸 복원하는 작업을 도와줄 메시지는 아무래도 이 책에서는 찾기 어렵겠다. 적어도 책에는 해법이 명료하게 적혀 있지 않다.




E.H. 카가 막연히 던져준 막연한 힌트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그저 혼자서 웅얼웅얼 생각을 넓혀본다.




'알랭 바디우도 마오이스트였다지. 아마 문화대혁명이 어떤지 실제로 몰라서 그랬을거야.  그런 지성인이 오류를 범했을 것이라 누구도 생각지 못했지. 68혁명 당시에도 마오이즘이 주요 세력 중 하나였고. 사르트르도 공산주의자였어. 우리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상을 펼치며 북한의 승리를 바랐다고 하니까 말이지. 그게 어마어마한 과오도 아니야. 시대가 그랬으니까. 좌파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실이 특이하게 여겨지는 시대였잖아. 그래, 그때는 그런 때였어. 리영희 교수도 어쩔 수 없었을거야. 그라고 어떻게 다 진실만을 알고, 말하겠어. '






#5.  2015년 12월.



8개월이 흘렀다. 그사이에 꽤나 많은 책을 읽었다. 권수로만 쳐도 60권 남짓 독파해 낸 것 같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비교적 뻣뻣하게 일관한 독서였기에,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할 수 있었다.




연말이다. 빽빽한 독서목록을 보고 있자니 일년이 다 갔음이 다가온다. 그런데 끝이 왠지 모르게 휑해 보였다. 중요한 1년이었으니까, 무언가 의미를 부여할 만한 책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외출을 나와 집 서가를 뒤적거리다 한 권을 골라냈다. 리영희 교수의 자전적 회고록, <대화: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이었다.











750쪽에 달하는 책을 완독하는데는 채 나흘이 걸리지 않았다. 어쩌면 해를 넘기기 전에 다 읽어내야겠다는 욕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부차적 이유다. 평생의 사표師表로 삼고 싶은 이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러운 인식이다.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화>는 믿음을 부여잡기에 충분한 해명이 되어 주었다.


벽제 경찰학교에서 가지게 된 의구심은 그의 자조섞인 해명과 반박을 보며 스르르 녹아간다. 그렇게 되리라 믿고 집어든 책이기도 하지만. 수십년의 세월동안 견지해 온 그의 올곧음과 일관됨이 의심의 균열을 메꾼다.





#6. 2008년.




외고 입시 준비에 몰두하던 때였다. 학원에 세로로 길쭉한 한겨레 기자수첩을 열심히 들고 다녔다. 남들이 물어보면 이렇게 답했다.



 "집에 이 수첩이 쌓여 있어서."



소위 말하는 '대외용' 핑계다. 아마 우리집의 뛰어난 조기교육에 나도 모르는 새에 세뇌되었던 것이리라. 내게 있어서 외고 준비는 단순한 입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환경에서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뛰어난 지식인이 되어 사회에 헌신하고 싶다'는 욕망에 오르기 위한 첫번째 계단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숭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달까. 표면상으로는 입시판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지만, 속으로는 고매한 차원의 목표를 설정했던 것이다.




아마 그 목표는, 리영희같은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렴풋하긴 했지만. 한겨레 기자수첩을 들고 있노라면 그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우리집 서가에 고이 보관돼 있던 <한겨레신문> 창간호와, 그것을 찍어낸 윤전기 앞에서 감격하고 있던 리영희 교수의 사진이.





#7. 2016년.




이제는 그 목표를, 욕망을,  본격적으로 좇아 보려고 한다.







#8.




그를 계속 떠올린다.


그를 생각하면서 읽고, 쓴다. 쓴 것을 읽고 다시 쓴다. 그리고 읽는다. 지난한 반복이다.


" 내 글에는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는 식이 없어. 정치이론도 사회비평도 다각도로 교차검증한 다음에 일단 소화하고, 내 머릿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고, 충분히 반죽해서 자신의 누룩을 가미해서 발효시켜서, 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서양 어느 박사의 어느 논문, 미국의 어느 교수의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것은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요. 그것을 일부러 명시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현학적인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런 현학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인용한 누구의 이름에 자기를 동일시하려는 허영에서 출발해요. 자기의 지식이 돼버린 것은 굳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한 철저한 '자기화'가 필요하지. 나의 수많은 논문과 평론, 심지어 신문, 잡지에 발표한 평범한 주제의 글도 다 이 정신과 방법으로 쓴 것입니다. "



종종 글이 막혀올 때면 그의 글을 읽는다. 나의 글을 써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보잘것 없는 이 글만 해도 지난 몇주간 몇번이나 고치고 매만진 결과물인 것을. 노력, 자기화.  앞으로 지겹도록 함께할 단어들이다.






#9.


시대의 선두에 서서 우상을 파괴했던 사람. 그를, 그가 썼던 글을, 그의 삶을 생각한다.



그를 회상하며 반추해 본 내 삶의 짧은 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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