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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10월~12월

[리뷰]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by 김인철

9월에서 10월의 공백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결말로 갈수록 이 두꺼운 책의 다음 장을 넘기기가 무거웠다. 소설의 결말은 예상 가능했고 끝에 다다르자 예상대로 허무했다. 작가가 마지막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은 후 캐릭터와 서사는 그대로 였을텐데 그 공백 사이에 내가 세상에 더 적응을 했거나 세상이 제 궤도에서 십일도쯤 빗겨났던 것일까?


덴고와 아오마메는 1Q84년의 시간에서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Q84년12월의 어느 끝자락에서 운명처럼 만났다. 둘 사이에 견우와 직녀같은 오작교는 필요 없었다. 차라리 끝까지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교단 선구의 의뢰를 받고 둘을 쫓던 우시카와는 아자부 노인의 충실한 심복인 다마루에게 교살을 당했다. 조연이었지만 비중이 높았던 그의 돌연한 죽음이 허무했다.


다른 시간의 1984년은 자연스럽게 흘렀다. 혼재된 두 세계의 시간은 홍시처럼 물렁하다가 사과처럼 딱딱했다. 어느 시점이 되자 나는 두 세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아오마메는 덴고와 섹스 없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천둥이 치던 날 밤 공기번데기가 열리고 후카에리와의 섹스였다. 교단 선구 리더의 딸이었던 그녀는 결국 덴고와 아오마메를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그녀는 덴고에게 찰나로 열린 시간의 황홀한 틈이었다.


두 사람은 제3수도고속도로의 지하계단을 통해 1984년의 세계로 나왔다. 세계의 어둠을 밝히던 두 개의 달은 사라졌다. 푸른 달이 의미하는게 무엇이었을까? 1984년의 세계도 먼 옛날엔 달이 두 개 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오마메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덴고의 아이였을까, 아니면 그녀가 살해한 교단 선구 리더의 아이였을까?


하루키의 문장은 부드럽고 독자의 상상력을 확대 시킨다. 수차례 읽던 책을 멈추고 다른 세계로 빠졌다. 하지만 작가의 어떤 말들은, 깊숙히 스며들지 못한 채 의식의 표피에서 기름처럼 겉돌았다. 어떤 문장들은 마른 밥알을 씹는 것처럼 까끌거렸다. 무엇보다 이 두꺼운 소설의 분량중 삼분의 이는 덜어 내도 이야기의 흐름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문학적 코스모폴리탄(특히 서구쪽)이던 그도 어쩔수 없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다.


덴고와 아오마메, 우시카와, 다마루, 후카에리, 소설 속 인물들은 허무주의와 나르시스즘에 취해 있다. 내용은 슬픈데 슬프지 않고 흐름은 황홀한데 황홀하지 않았다. 깊은 열락이나 환락에 매몰 되지도 않는 뜨듯 미지근함이 단어와 문장 사이를 시냇물처럼 흘렀다, 어떤 문장들은 공중을 부유하는 의식에 취하게 했지만 단락과 문장이 끝나면 돌아오는 건 역시나 짙은 허무함이었다.


나르시시즘과 허무주의로 가득했던 세계의 부작용일까? 프랑수와즈 사강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무형의 부유물처럼 하루키의 문장 사이를 떠다녔다. 이 소설에선 아무도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았지만 적의를 품거나 필요에 의한 타인들에게 그들은 조금씩 무너졌다. 그래도 하루에 한 두시간씩 다른 세계를 살게 해준 이 소설을 좋아한다. 당분간은 하루키를 찾지 않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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