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잎소설]백수와 여자

by 김인철

[제 30화 : 두근두근 우리 인생 ]


[남자, 그리고 여자]


잠시 후 공연 시작이다. 객석 뒤편에 그녀가 서 있다. 왔구나.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공연 준비로 인사만 잠깐 나누었다. 휴~ 공연은 잘 끝났다. 눈물 날 뻔했다. 사실 쪼끔 흘렸다. 아이들이 정말 고맙고 대견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선생님들과 뒤풀이를 잠깐 참석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 뚜우. 이런, 이런,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 공중전화를 찾았다. 두 번 세 번.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 왜 말도 없이 가버렸어요? 그때 거기서 만날까요? 아니, 꼭 만나요. 기다릴 거예요.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그녀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졌다. 우산도 없이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는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당장 나오라고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나온단다. 한 시간 후 그녀는 쫄딱 비를 맞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스키니진, 단색 운동화 그리고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목걸이가 반짝였다. 잘 어울렸다. 노래 가 부르고 싶었다. 가까운 노래방을 찾았다.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근처 옷가게에서 티셔츠 하나를 사 왔다. 좁은 룸에서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음정 박자 가사 제각각이었다. 그녀도 노래를 불렀다. 마이크를 잡은 두 손 어깨허리 이마 목덜미 블라우스 속으로 언뜻 비치는 그녀의 목덜미는 유난희 희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않았다. 깜짝 놀란 그녀는 마이크를 떨어트렸다. 그녀를 내 앞으로 돌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조명에 비친 그녀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내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근두근 떨렸다. 그녀의 오종종한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부드러웠다. 달콤했다. 황홀했다. 그녀는 어떠한 미동도 없이 내 의지와 행동과 그리고 거친 숨결을 받아주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거울을 보며 수백 번도 더 넘게 연습했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내 안의 강렬한 열망들을 지금 이 순간 그녀 앞에서 말과 말이 아닌 몸짓으로 쏟아냈다. 뺨을 맞아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뺨을 치는 대신 내 가슴에 그녀의 귀를 갖다 대었다.


"심장소리가 꼭 천둥 같아."


우리는 서로를 한동안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다. 탁자 위에 넘어진 캔맥주에서는 남은 맥주가 바닥으로 흘렀다.

띠리링...


[선생님 그동안 아이들과 문화제 발표회 준비하느라 고생하셨어요.

다음 주 월요일부터 푸른학교로 출근하세요.]


-끝-

[프롤로그]


사랑은 '투명한 나비'다. 겨우 백수를 탈출한 제비도, 여자도, '투명한 나비'를 찾아 방황을 한 게 아닐까. 나풀나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삶의 영역에서 실패라는 말이 [의미 없는] 영역은 사랑이 아닐까. 모든 형태의 사랑은 결국 제 나름의 무게를 견뎌야 하니까. 달콤하고 애틋하고 고통스럽고 민망하고 쓸쓸하고, 때로는 '프렌치토스트'나 '리코다 치즈 샐러드'같은 달달함을 맛보기도 하고, 무엇이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하겠지만. 종국엔 잔잔한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처럼 우리들의 사랑은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결국 누군가에게 사랑은 영원히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면역이 되지 않은 채, 허공을 선회하는 투명한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리의 의식 속에 지난했던 감정의 부유물만 동동 떠 다니겠지.


결국 이 이야기는 '빵과 장미'의 이야기다. '빵과 장미'의 켄 로치가 말했듯 인간은 결코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도저하고 갑갑한 삶의 굴레를 뚫고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장미'를 찾아 떠나야 한다. 그것도 붉은 장미를. 삶의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처럼 나의 붉은 장미는 내 손에 쥔 빵과 동일하지 않다. 아니 달라야 한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다른 장미여야 한다. 하나의 불이 모두에게 다르듯이.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죄로 받아야 했던 시시포스의 형벌은 모든 인간의 삶, 고통에 조금씩 덧씌워진 티눈이니까. 하여 장미는 시시포스의 다른 형벌이자 축복이다.


서른한 살에 시작한 푸른 학교는 가장 적확한 내 삶의 [터닝포인트]였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식어 버린 나의 '빵'한 조각과 말라버린 '장미'를 되살리기 위한 가장 적확한 터닝포인트. 그 안에서 함께 할 사람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의 말처럼 일은 바보처럼 열심이면서 사랑에 소극적이던 나의 모습은 타일이 깨진 욕실의 습기 찬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희뿌연 상태로만 남은. 노희경의 소설 제목처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면 '고백하지 않는 자 역시 유죄'라는 정류장의 그녀의 한마디를 기억하며.


'심장이 천둥 같다던!' 노래방 키스처럼 두둥거리던 심장을 듣고 있던 그녀의 해사한 눈동자와 촉촉한 목소리가 수년이 흘렀어도 생생하다. 뺨을 후려갈기는 대신 남자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던 그녀. 새롭게 다가올 또 하나의 천둥/벼락같은 사랑을 위해서 오늘 밤, 후드득 담벼락에 몰아치는 저 굵은 빗줄기는 붉은 장미, 아니 아열대성 폭우를 비껴간 상쾌한 소나기다. 쿵쿵! 툭툭! 있는 힘껏 쳐 봐, 겉은 비루하고 정신은 나약해도 내 심장은 아직 튼튼하니까. 장마나 폭우 따위로는 어림없지. 그럼에도 결국 포옹과 키스라니. 바쁘고 정신없다고 게을러진 영혼에 발동을 걸기 위한 글의 결론 치고는 허무하다. 하지만 손과 손이,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것에서부터 새로운 관계는 시작된다. 그 결론의 끝에 마침표를 찍는다. 높은 음자리표나 도돌이표는 생략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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