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청소년 인문학 수업이 이제 끝을 향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만 오늘 수업 주제는 상당히 어려웠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남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심오하게 일그러질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수업 직후 월드컵 아르헨티나전이 열린다. 다섯 시가 넘자 응원하러 가야 한다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빗발친다. 수업 끝나고 공부방에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함께 응원하자며 못 온다는 녀석들을 협박하듯이 달랬다.
지난주는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이유'였다.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까닭, 그것은 의지가 아니라 자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만 놓고 보자면 말이다. 그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불편한 자세로 지옥을 보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한 자세인 '반가 사유상'은 생각다운 생각을 할 수 있다.
살아남는 것과 살아가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파키스탄의 축구공 노동자들의 사진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13살 정도의 아이들이다. 그들이 손으로 꿰매서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축구공은 한 개나 두 개 정도. 그 대가로 개당 150원 정도를 받는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단적인 예다.
살아남아야 하는 직업들은 그 외에도 부지기수다. 카카오 노동자, 사금 채취꾼, 학생들에게 멸시받는 그들의 부모일지도 모를 대학교의 미화원, 그들의 할머니 일지도 모를 폐지 줍는 할머니들. 신기하다. 우리 사회는 이런 비극에 둔감해져 있다. 아무도 그들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일지 모르는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버스 차창으로 비치는 그들의 일상을 우리는 그저 풍경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어떤 것이 살아가는 것이며 어떤 것이 살아남는 것인가? 나는 지금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는 것일까?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 두 개의 명제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극과 극이다. 결국엔 살아남는 것보다는 살아가는 것들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월드컵 응원 때문에 30분 정도 일찍 끝낸 오늘 인문학 수업의 핵심이다. '구차하게'나 '함께' 혹은 '더불어' 같은 부사가 들어가면 그 의미는 더욱 명확해진다. 구차하거나 비참하게 살아남는 것들,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고민 말이다.
다음날 평가시간. 아이들에게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들의 삶이 정말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빌 게이츠의 삶은 그가 즐겨 입는 청바지처럼 소박하지 않다. 그가 전 지구인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글로벌한 선행을 칭송하기 전에 그의 발밑에서 무참히 쓰러졌을 삶을 한 번쯤은 뒤돌아 봐야 한다.
김장훈, 지누&션 부부의 선행도 언급되었다. 한 달에 한번 생일파티를 열어주는 '나누미' 선생님도 언급되었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스타벅스' 같은 거대 다국적 기업의 생색 내기용 '공정무역'은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에 대한 일종의 기만술이다. 점심 한 끼 값보다 커피 한잔이 더 비싸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고도의 기만술이다.
아르헨티나 전에서 한국이 4대 1로 졌다. 응원을 마치고 편의점에 들러서 아이들과 함께 '빵과 우유'로 허기를 달래는데 얼굴이 불콰한 어르신이 한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 하나를 건넨다.
"이거, 뜯기만 했지 손 하나도 안 댔어. 먹어도 되는 거야?"
아이는 나를 한번 보더니 아저씨가 건네는 컵라면을 두 손으로 받았다. 물을 붓지는 않았지만 뚜껑이 열려 있었고 수프가 면 위에 뿌려져 있었다. 그 어르신은 왜 하필 우리에게 그가 먹으려다가 만 컵라면을 주었을까? 그는 또 아무 이상 없다면서 뚜껑이 열린 컵라면 한 개를 더 건넸다. 다시, 왜 하필 우리였을까? 그 아저씨의 선행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분명 그는 좋은 의미로 그가 먹으려다가 만 컵라면을 우리에게 주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찜찜한 까닭은 그에게 필요가 없어진 것을 주었다는 것이다.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거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줘라!"
그 순간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듯했다. 의미를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떠올랐다. 오드리 헵번이었나? 누가 했든 중요치 않다. 패배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정류장엔 온통 붉은 물결이다. 혼자라면 모를까. 꾸역꾸역 몰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버스를 타기는 힘들 것 같다. 택시를 잡기는 더더욱 불가능해 보였다. 택시잡기와 더불어 살아가기. 우리는 차라리 지하철을 택했다.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살아남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2010년 6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