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목요일 인문학 수업 8차시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마지막 인문학 수업이어야 하는데 4차시 수업을 맡으셨던 교수님이 몸이 좋지 않아서 다음 한주가 더 남았다. 오늘 강의를 해주실 선생님은 홍세화 선생님이시다. '나는 파리의 택시 운전사'를 쓰신 분이시다. 어제 수업 확인 차 전화를 드렸는데 중학생들이어서 오늘 수업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를 걱정하셨다.
홍세화 선생님에겐 이번을 포함해서 세 번 정도 강의를 들었다. 요즘은 '앵똘레랑스(불관용)'의 분위기지만 한동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이해, 관용으로 해석되는 '똘레랑스' 용어를 퍼뜨린 분이다. 보통 책으로 먼저 접하는 저자들을 실제로 볼 때면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끼곤 하는데 홍세화 선생님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실제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표지 사진은 제외하고 말이다.
선생님은 강의 첫머리를 손자 손녀를 가르치듯이 옛날이야기로 시작하셨다. 아이들 눈이 반짝반짝거렸다. 아름다운 여자, 경비대장, 그리고 경비대장을 사랑하는 공주 이야기다. 경비대장을 사랑한 공주가 질투심에 눈이 먼 나머지 아리따운 여자와 무서운 사자를 두 개의 방에 가둬놓고 경비 대장에게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시험했다. 공주는 경비대장에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방을 알려준다. 문제는 공주의 말을 믿을 것인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나왔지만 선생님은 끝내 답을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빛나는 시선이 계속 홍세화 선생님에게 향했다.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나도 처음엔 이 숫자들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홍세화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노사 교육을 받는 북유럽의 학생들은 이 숫자들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북유럽의 어린이들조차 알고 있는 것들을 우리는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고 교육을 받지 않았으므로' 생각 속에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숫자는 산업 혁명 이후 노동자들의 하루 노동 시간의 변화였다. 저 숫자들 사이에서 지금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다. 그리고 이것이 복지국가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숫자는 메이데이, 바로 시카고 노동자들의 하루 8시간 노동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절(근로자의 날)의 시작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생각 속에 들어 있어야 하는 것들인데 그렇지 못한 것들은 이것들 뿐 만이 아니다. 성경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일요일을 쉴 수 있게 된지도 채 백 년이 되지 않았다. 생각 속에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취지와 제안을 담고 있더라도 일단 사람들은 그것을 부정해 버린다. 이를테면, 무상 의료, 무상 급식. 무상교육. 실현되면 가장 먼저 수혜를 받을 수 있는 대상들이 먼저 부정해 버린다. 선진국들이 국민소득이 채 만 달러가 안 될 때 이루었던 것들을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꾼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나 꿈만 꾸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교육을 하면, 특히 그 대상이 아직 밝은 것만 보고 자라야 할 아이들에게 하는 것이라면 '의식화 교육'이라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들의 시각도 결국 사적 이익을 취하려는 누군가에 의해서 철저히 의식화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식화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화 교육이야 말로 정말 필요하다. 특히 학교를 벗어나서 사회의 가장 낮은 영역으로 삶을 선택해야 할 가능성이 높은 이들에겐 더욱 필요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학생들의 90퍼센트 이상이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현실에서 최소한 그들이 누리는 권리를 알게 하는 노사 교육은 지극히 당연해요."
맞는 말이다. 나 또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운동장에선 앞으로나란히 와 똑바로 줄 서기를 연습하고 교실에선 주야장천 납땜 연습만 배웠지 나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의식화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무리 억울하고 불합리한 것이었더라도 그냥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맞는 것인 양 별다른 저항 없이 일만 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 그것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구태여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나도 그랬다. 그럼 지금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글쎄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행동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그렇지만 그 삶은 이전의 삶처럼 평탄하지는 않다. 그래서 '촘스키'의 말처럼 사람들은 종종 진실이 뭔지를 알면서도 일부러 그것을 외면한다. 앎이 실천으로 옮겨가는 순간 사람들의 삶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강의는 끝날 무렵 다소 집중력이 흐트러지긴 했지만 아이들은 진지한 모습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강의를 마친 후엔 학벌 없는 사회에서 준비한 책을 아이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주고 선생님에게 직접 사인도 받았다. 오늘 강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내 생각은 과연 내 생각이 맞는 것일까? 믿는 사람이 있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이든 어떤 현상이나 상황을 믿기 전에 한 번쯤은 생각을 해 봐야 한다.’ 불편하게 앉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가부좌를 틀고 있는 '반가사유상'처럼 말이다. 진실을 외면하다 허벅지의 뼈가 굳어 버린 이들에게는 가부좌마저도 편치 않을 테지만.
2010년 6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