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는다.

금전 거래,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

by 김인철

얼마 전 아는 A가 전화를 했다. 안부 전화려니 했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물었고 나는 지난번에 퇴직한 직장에서 받았던 부당한 대우가 잘 해결되었다고 전했다. A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전했다. A에게 일터와 가족의 안녕을 물었다. 얼마 전 어머니가 무릎수술을 받으셨다고 했다. 이 년 전쯤 디스크 수술로 고생하셨는데 이번엔 무릎수술도 하셨단다. A는 외동이라 일과 병간호를 해야 했을 것이기에 고생이 많았겠다고 했다. 조만간 술 한잔 하자고 하며 통화를 마쳤다.


그런데 잠시 후 A가 다시 전화를 했다.


A는 방금 전의 목소리와는 다른 톤이었다. 그는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미적거렸다. 내가 불쾌해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순간 A에게 실수를 한 게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딱히 실수나 실언을 한 적은 없었다. 한참을 더 미적거리더니 "형, 저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라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돈을 빌려달라"는 말은 내 머릿속에 없던 문장이라 처음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출처_PIXABAY


"어머니 무릎 수술을 했는데 병원비가 천만 원이 넘게 나왔어요."

"무릎 수술을 하는데 병원비가 그렇게 많이 나와?"


이상해서 물었더니....


"비급여라서 많이 나왔어요."


평소 A의 성정을 알기에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도 지금은 직장을 쉬고 있기에 수입이 없다. 그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중고마켓에 값이 좀 나가는 물건을 팔아서 생활비를 보태고 있는 상황이다. 통장에 아예 생활비가 없다는 것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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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도 내가 일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고 한다. 나는 돈거래에 관해서는 기준이 확실한 편이다.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는다. 살면서 가족을 제외하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준 적이 없다. 회사 동료에게 백만 원을 두 차례 빌려준 게 내 인생에서 금전 거래의 전부다. 물론 돌려받았다. 최근에도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좀 서운할지라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잘 지내지?"

"응."

"미안한데 돈 좀 빌려 줄 수 있니?"


몇 년 전엔 초등 동창이 돈을 좀 빌려달라고 했다. 나는 사정이 안돼서 어렵다고 했다. 친구는 미안하다며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석 달쯤 지나서 그 친구의 부고 문자를 받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친구에게 조문을 하고 다른 동창들을 만났다. 다들 돈을 좀 융통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빌려준 친구도 있고 빌려주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도박을 하거나 보증을 잘못 서거나 사업을 하다가 빚을 크게 진 것도 아니었다. 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을까?


"선생님, 죄송한데 돈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어머니가 수술비가 필요한데 돈이 많이 모자라요."


성인이 된 두 제자에게도 돈을 빌려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한 제자는 누나가 암에 걸렸는데 수술비가 이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한 제자는 어머니 병원비가 부족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돈을 빌려 달라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꼈던 제자 한 명은 그 뒤로 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 여기지만 마음이 좋지 않다.


출처_PIXABAY


좀 더 먼 시간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친구는 자정이 다 되었을때즘 전화를 했다. 그도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본인이 암에 걸려서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비 이백만 원이 부족해서 퇴원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빌려주면 일주일 후에 보험료가 나오면 바로 갚겠다고 했다.


그는 아내와 자녀가 있고 카센터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백만 원이 없어서 퇴원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다른 동창에게 그 친구의 소식을 물어보니 오래전에 다른 친구에게 칠백만 원을 빌린 채 아직 갚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말 병원비가 급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돈을 좀 빌려달라는 A의 부탁에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빌려주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형, 술 한잔 해요."


몇 달이 흘러 A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자주 가던 술집에서 만났다. 다시 만난 A는 그날의 통화와 관련해서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일과 근황을 물으며 맥주잔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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