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에포크, 경수의 수첩
7화 요약
Y대에서는 총장의 성추행 및 교비 횡령 의혹이 불거졌다. 하지만 신고가 취소되고 검찰에서도 불기소되자 학생들은 총장 퇴진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격화되어 총장실 점거로 이어졌고, 경찰이 학생들을 해산시키며 주동자들에겐 출교 처분이 내려졌다. 시위에 참여했던 문창과 대표도 출교 되었다. 문창과는 신임 과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임시총회를 열었고 의외의 인물인 경수가 과대표가 되었다. 늘 조용했던 경수의 변화 뒤에는 K라는 인물이 있었고, 그는 총장 퇴진 시위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수의 과대표 출마는 그의 의지였을까?
8화. 벨에포크, 경수의 수첩
경수는 과대표가 되자 가장 먼저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문학동아리를 활성화 시켰다. 먼저 기존 동아리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동아리 이름을 ‘디딤돌 문학회’에서 '벨에포크'로 바꾸었다. 벨에포크는 프랑스어로 '아름다운 시대'라는 의미다. 동아리방 구석에 어수선하게 놓여있던 시집과 소설책, 철지난 문예지들도 장르별로 구분하여 책장에 반듯하게 꽃아놓았다. 가장 잘보이는 곳에 놓인 신간 서적들은 K가 가지고 있던 평론집과 철학서적 들이었다. 벨에포크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로 바뀌었다. 전에는 동아리방이 이상적이고 자유분방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자로잰듯 반듯하고 절제된채 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벨에포크 회원들이 창작한 시나 소설을 낭송하고 비평을 했다.
벨에포크 멤버는 기존 멤버였던 수아, 창훈, 시원, 소영이 그리고 새로 가입한 신입생들을 포함 열명이었다. 경수는 K에게 벨에포크 모임을 이끌어 달라고 했고 K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술자리에서든 강의실에서든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다. 조교인 소진도 K와 마주할 일이 많았다.
“자네는 경수 군을 어떻게 생각하지?”
K의 질문에 소진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경수요? 과대표가 되더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리더쉽도 있고. 후배들도 잘 따라요.”
“그래? 난 처음부터 경수, 그 친구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 진정성이 느껴져. 누구처럼 가식적이지도 않고.”
K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순간 소진은 K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소진은 그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불편했다. 그것은 자신이 숨기고 싶은 내밀한 감정을 소진에게 들킨듯한 표정이었다. 소진은 K가 어떤 마음으로 경수에게 접근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이번엔 제발 그를 망치치 않기를 바랐다.
경수는 법이 없어도 살만큼 순수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곤죽이 되도록 술을 많이 마셨어도 언제나 예의 바른 태도로 선배들의 짓궂은 농담과 후배들의 고민을 찬찬히 들어주었다. 그는 과대표로서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며 모두를 챙겼다. 선배들은 경수를 아꼈고 후배들은 믿고 신뢰했다.
한편, 경수는 K를 존경하고 동경했다. 벨에포크의 첫 모임에서 K는 열정적인 어조로 강연을 시작했다.
“문학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한 시대의 영혼은 가난한 시인들과 작가들에 의해 풍족해져.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의학,법률,경제,기술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사랑, 낭만은 삶의 목적인거야. 다시 말하면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가르침이지."
K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 말한 대사를 언급하며 펼친 삶에 관한 철학적 해석은 삭막하던 벨에포크의 분위기를 한껏 고무시키며 낭만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새내기들은 물론 소진과 선배들까지도 그의 지적 아우라에 감탄했다. 그날 이후 경수와 새내기들은 K의 철학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K가 말했어.”
“K라면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그들의 말에는 K를 향한 한없는 존경과 경외심이 배어 있었다. 경수는 학과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고민이 생길 때도 K에게 먼저 상담을 요청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진에게 물었다.
“선배는 K를 오랫동안 알았죠?"
"그렇지, 한 칠 년 정도 되었나?"
"선배는 K를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소진 선배가 한 번도 K에 관해서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소진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지.”
경수는 완전히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K가 정말 부러워요.”
“뭐가?”
“그의 박식함이요. 난 살면서 K만큼 똑똑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경수는 소진에게 그동안 K가 했던 말들을 적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손때가 묻은 페이지마다 K의 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떤 날은 술자리에서, 어떤 날은 강의실에서, 혹은 캠퍼스를 거닐며 K가 툭 던진 말 한마디까지. 경수는 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체 K는 책을 얼마나 많이 읽은 걸까?"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K처럼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을 거야."
경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역사, 철학, 문학, 심지어 과학까지도 K의 입에서 나오면 그 모든 지식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처럼 엮였다. 경수는 K의 모든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하나의 흐름처럼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어했다. 경수의 수첩은 단순한 암기가 아니었다. K를 위한 경전이었다.
"난 살면서 저렇게 말 잘하고, 박식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경수는 그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람들은 늘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비오는 날엔 우산을 잃어버리고 지갑을 잃어버리고, 과거를 잃어버리고 결국 꿈도 이상도 잃어버려. 한동안 실망과 낙담을 하지만 곧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은 이어져.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우리는 단지 무언가를 잃어버린 상황에 익숙해질 뿐이야. 끔찍한 경험은 켜켜이 쌓이는 지하실의 먼지처럼 저마다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법이거든. 어릴 적 술 취한 아버지에게 허벅지를 칼부림 당하던 기억처럼, 트럭 운전수에게 당했던 성폭행처럼, 오래된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그 날의 상처는 잊지 못하듯이. 그러므로 무언가를 잊어버리기 전까지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야.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끔찍하게 싫은 기억이든."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거기엔 깊이가 있었다. K의 말은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가벼운 조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통찰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질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는 모든 걸 가졌어. 지적 능력, 표현력, 카리스마, 그리고..."
경수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K를 동경하는 이유는 단순한 박식함 때문만이 아니었다. K는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이었다. 어떤 순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언제나 중심을 잡고 서 있는 사람. 그의 말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나도 K처럼 될 수 있을까?"
경수는 손에 든 수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수많은 글자들이 새어 나오듯, 그의 머릿속엔 항상 K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소진은 경수의 수첩에 적힌 글을 읽으며 K가 자신의 감추고 싶어하던 과거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소진은 경수에게 어떤 말들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몇 년 전의 한 인물이 떠올랐다. K를 향해 비슷한 경외의 눈빛을 보내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결말은 좋지 않았다. 소진은 경수를 보며 생각했다.
‘경수도 결국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