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메이데이

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by 김인철

아이들을 일찍 보냈다. 목요일 9시 종합시장 '해적' 앞에서 jj를 기다린다. 오늘 우리의 모임은 무척이나 설렌다. 남자들만의 모임에서 어떤 설렘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내 경우는 그랬다.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머릿속에 선 한 주 내내 유쾌하지 않았던 상황들이 두서없이 밀려온다.


사진출처-pixabay

올해도 11월은 모두가 그만두는 달이다. 뒤에 서서 바라보는 11월은 채 비어 먹지 못한 빼빼로처럼 가늘다. 11월은 흘러가지만 상처들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12월이 두려운 까닭은 다양하다. 성큼성큼 걸어서 어떠한 상처도 없이 지나가라. 저녁에 동동주나 한잔 할까?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맥주보다는 고갈비와 동동주가 먹고 싶다. 고갈비라면 인사동 모퉁이. 약속 장소에서 그리 멀지도 않다. 김광석과 장사익, 사연 깊은 가수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그곳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굳이 선택하자면 나는 김광석, 그리고 서른 즈음에.


서른 즈음이 되면 이십 대의 감성은 트렌디 드라마처럼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십, 오십이 되어도 '서른 즈음에'는 가슴에 와 닿을 것만 같다. 서른을 훌쩍 넘겼지만 감성은 이 노래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여리고 벅차다. 오늘 모임을 인사동 모퉁이로 장소를 바꿔야겠다. 오늘 같은 날씨라면 고갈비와 동동주, 그리고 오징어 조개 새우가 들어간 두터운 해물 파전이 제격이니까.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해적' 말고, '인사동 모퉁이'로 하자".

"거기가 어딘데요."

"이 근처야."

"좋아요."

오지 않은 사람들은 먼저 온 사람에 대한 예의로 장소 변경을 흔쾌히 승낙한다. 추위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c형님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반갑게 악수를 건넨다. 형님은 다른 곳에서 교육받고 오는 중이란다. 모임을 주선한 막내 k는 아직 일이 덜 끝났단다. 가장 먼저 오기로 한 jj는 장소를 착각해서 모란에 가있다. 컴컴한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가 인사동 모퉁이 계단으로 들어섰다. 입구가 낮아서 머리를 조심해야 한다.

"와~ 여기 진짜 좋은데."

"여기 고갈비와 동동주가 아주 죽여요"

"그래?"

"근데 고갈비는 고등어가 아니죠. 삼치나 임연수 정도."

jj와 나 그리고 c형님이 먼저 동동주 몇 순배를 돌리는 사이 일행 셋이 더 늘었다. y와 d, 막내 k

"형님들! 오늘은 진짜 기념할 날이죠?"

"그러게."

"우와 진짜. 남자 교사들끼리만 모인 건 처음 아니에요."

"난 오 년 만에 처음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뭐랄까?"

"11월의 메이데이, 도원결의."

"아니? 인사동 결의."

"맞아, 맞아, 인사동 결의."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술기운이 오른 남자들은 다소 과격한 언어를 구사하며 오늘의 벅찬 감격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냈다. 공부방 혹은 지역아동센터라는 모임에서 오로지 남자들만으로 어떤 모임이 만들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쁨과 환희는 나만이 아니다. 짐작은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각 센터를 맡고 있는 남자 교사들의 애로사항이나 고민이 같다는 사실에 놀랐다. 공부방 안에서 풀어내는 애환, 그리고 남자들만의 이야기. 오늘은 정말 꿈만 같았다.

"오늘은 메이데이. 인사동 결의"

오늘은 설득이 필요한 '혁명'보다는 헤까닥 갈아서 엎어 버리는 '쿠데타'가 필요한 날이다. 한 번쯤 뒤집어엎은 다음 다시 제자리에만 돌려놓으면 된다. 아니 그것도 과분한. 메이데이. 그래 11월 어느 날의 메이데이. 인사동에서 1860년대 시카고 노동자들의 뜨거운 쟁투처럼. 11월의 어느 날에 거미줄 창창 늘어진 구석에서 동동주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어떤 명분도 필요 없이 오늘을 건조하게 '메이데이'화 시켜버렸다. 남자들만의 모임이라는 환희나 기쁨도 잠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쩔 수 없는 교사, 센터 장, 그리고 실무자일 수밖에 없다.

"형님 저 미치겠어요."

"뭐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들어 간지 얼마나 됐지? 한 달 두 달."

"한 달?"

"욕심부리지 마!"

"지금 네가 하는 고민은 1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정말 큰 문제는 2차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필요하다면 아이들과 감정싸움도 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감상적 수사가 아닌 '필요하다면'이 아니라 절대적이라는 것. 감정싸움에선 밀 때와 당길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너는 아직 그럴 짬밥이 되지 않는다는 것. 발언권을 얻기 위해선 그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아이들과의 감정싸움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당신, 혹은 내가 편 하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나타날 결과를 방지하기보다는 무책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형님! 저는 지금 이 시간이 정말 너무나 소중합니다."

잔을 높이 들고 거창하게 인사동 결의를 외쳐보지만 생각 끄트머리 한구석엔 어떤 누구와의 감정싸움에 골이 파여 있다. 그 아이는 대체 왜 그랬을까? k앞에서 짐짓 잰 채 하며 경험을 공유하지만 그 아이와의 감정싸움은 오늘을 넘어서 내일 그리고 주말을 온전히 채울 것이 뻔하다.

"형님, 우리가 왜 진작 이런 모임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오늘 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형님 그리고 다른 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제 고민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의 '인사동 결의'는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또 하나의 시작이 끝을 맺는 시각은 새벽 네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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