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 통장엔 평균 얼마가 들어 있나요?
지난해 4월 퇴직을 했다. 몇 달 쉬다가 다시 일을 하려 했지만, 이전 직장에서 상사에게 당한 갑질의 트라우마가 깊게 남았다. 사직 의사를 밝히고 그만두는 날까지 상사의 갑질은 도를 넘었다. 남은 연차 사용을 막고, 조금만 실수를 해도 직원들 앞에서 조롱하며, 심지어 정당한 연차를 무단결근 처리해 급여까지 빼앗았다. 결국 퇴사 후 노동부에 진정을 넣었고 최종 승소까지 했다. 하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다시 일을 하고 싶은 의욕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일 년 전 퇴사를 할 당시 내 생활비 통장에는 1,000만 원이 조금 넘게 있었다. 1,000만 원의 가치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에겐 큰돈일 수도, 어떤 이에겐 적은 액수일 수도 있다. 내게 1,000만 원은 생명줄 같은 돈이었다. 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액수다. 하지만 내 통장은 화수분이 아니다. 공과금, 식비, 의료비 등 날마다 돈이 빠져나갔다. 그런데 퇴직한 지 1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통장에는 여전히 1,000만 원이 남아 있다. 마치 마르지 않는 화수분처럼.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말이 안 된다.
나는 1인가구다. 돌볼 가족도, 책임질 사람도 없다.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된다. 외식은 거의 하지 않고 집에서 해 먹었다. 카레와 비빔밥, 된장찌개, 청국장, 김치찌개 등 조리하기 쉽고 간편한 메뉴였다. 지난 일년간 온라인 구매 목록을 보니 대부분 식재료나 생활용품이었다. 놀랍게도 옷이나 신발같은 의류는 한 번도 구입하지 않았다.
아무리 아껴도 한 달 생활비는 80~90만 원쯤 든다. 그렇다면 지금쯤 내 생활비 통장은 텅 비어 있어야 정상이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 내가 몸을 써서 한 노동이라곤 단 하루뿐이었다. 그것도 쿠팡 웰컴데이, 말하자면 노동 현장 체험 같은 거였다. 일당은 받았으니 노동은 노동이지만, 그뿐이었다.
그런데도 현재 내 생활비 통장에서 1.000만 원이라는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줄었다가도 다시 채워졌다. 물론 수입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전 직장 퇴직금, 받지 못했던 연차수당, 모아 두었던 기사 원고료, 은행 이자, 지인에게 빌려줬던 돈 일부를 돌려받았다. 중고거래도 했다. 하지만 그 액수들은 소소했다.
돌이켜보면 신기하다. 일 년이 넘도록 노동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버티고 있지?’ 싶다가도 ‘어쨌든 이렇게 살고 있으니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주부터는 오랜 백수 생활을 접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정규직은 아니고 급여도 넉넉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내 생활비 통장에는 계속 1,000만 원이 남아 있을 것이다. 살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바깥은 여름의 끝자락, 폭염도 한풀 꺾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