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종합병원'의 유래를 설명한다. 과거엔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이 없었다. 비정상은 종교적인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성과 비이성. 이분법은 차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차별은 성의 안과 밖을 분리한다. 17세기의 유럽은 이성이 비이성을 가두는 시기였다. 비정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존재, 부랑자, 행려병자, 노숙자, 그리고 광인을 성문 밖으로 쫓아냈다. 18세기에는 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성문 밖으로 쫓아낸 부랑자와 행려병자, 노숙자를 분리했고, 수용시설엔 광인만 남게 되었다. 이렇듯 종합병원의 시작은 구빈원과 같은 수용시설이었다.
▲ 조커 조커 스틸컷ⓒ 조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봤다. 조커와 한 몸이 된듯한 그의 표정과 몸짓, 우울한 독백에 깊이 빠져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우울함과 분노가 일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바쁜 일상 속에서 정신이 없다가도 조커에 이입된 불편한 감정들이 송곳처럼 불쑥불쑥 솟아오르곤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가 이 우울한 영화에 공명한 까닭은. 한마디로 '존재와 인정 욕구에 관한 우울한 묵시록'이다.
아서는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다.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꿈이다. 사람을 즐겁게 해 주라는 엄마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코미디언으로서 자질이 없다. 사람들을 웃기기보다는 그 웃음이 자신을 향할 때가 많다. 게다가 웃음의 포인트도 다르다. 그는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객석에서 관객들이 웃을 때 함께 웃지 않는다. 사람들의 웃음 사이에 자신의 웃음을 NG처럼 삽입한다. 그런 아서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역대 배트맨 시리즈에서 많은 배우들이 조커 역을 맡았다.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잭 니콜슨, 히스 레저 등 기존의 조커를 맡았던 배우들과는 다르다. 잭 니콜슨의 조커는 희극적 요소, 히스 레저의 조커는 진지한 카리스마, 그리고 자레드 레토(수어사이드)가 로맨티시스트적 요소가 강했다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시종일관 우울한 카리스마다. 조커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김치, 치즈, 스마일, 사회적 가면을 써야 하는 삶
영화 초반 아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입이 찢어질 듯이 크게 웃는 장면이 나온다. 예전에 내가 밥벌이를 위해서 참아야 했던 힘겨운 상황과 겹쳐진다. 매일 아침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계단 앞에서 김치, 치즈, 스마일을 서너 번 연습한 후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 나는 존재감이 없었다. 아서처럼 동료들과 섞일 수 없었다. 능력이 아닌 철학과 가치관이 더 중요했다. 반쯤은 투명인간이었다. 아닌 척했지만 아닌 게 아니었고 괜찮은 척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아서처럼 동료들의 인정 욕구에 시달렸다.
배트맨 시리즈는 암울하다. 배트맨과 조커, 죄의식 없는 범죄자들. 맹목적인 추종자들. 고담시는 거대한 종합병원이다. 부모가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한 배트맨(부르스 웨인)도 결국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선한 광기다. 폭력과 광기의 상징인 조커를 내면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어떤 점이 나를 공명 시켰을까? 최근에 겪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화점 직원이 진상고객에게 무릎을 꿇리듯, 이유 없는 갑질을 홀로 견뎌내야 해서였을 것이다. 영화는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지만, 자신의 우울한 현실을 거울처럼 투영시키기도 하니까.
조커의 웃음이 의미하는 것들.
영화에서 조커의 웃음은 중요한 상징이다. 일부 장면들은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아서의 웃음은 타이밍이 어긋난다. 웃어야 할 때 웃지 않는다. 타이밍이 어긋난 웃음은 아서가 느끼는 개인적, 사회적 부조리에 저항하는 최소한의 방식이다. 이 장면은 사르트르의 '구토'를 연상시킨다. 로캉탱은 삶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접할 때마다 구토를 한다.
▲ 조커 조커 스틸컷ⓒ 조커
버스 안의 장면도 인상적이다. 아서는 해맑은 아이를 보며 웃는다. 아이도 아서를 따라서 웃는다. 하지만 아서의 웃음을 대하는 아이의 엄마는 매몰차다. 어른들의 시선에서 아서의 웃음은 불편하고 낯설다. 철저히 외면과 경계의 대상이다.
계단이 상징하는 것들에 관하여.
영화에서 계단은 계층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조커에서도 계단은 아서의 감정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다. 아서는 인정 욕망의 결핍에 시달리며 축 쳐진 등과 어깨로 계단을 힘겹게 오른다. 감독은 이 장면을 관객들에게 한번 더 보여준다.
▲ 조커 조커 스틸컷ⓒ 조커
후반 조커로 각성을 한 후 리드미컬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과 대비된다. 동료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계단을 오를 때는 힘겹게 오르지만 조커로 각성을 한채 내려오는 계단은 얼마나 리드미컬하고 가벼운가.
조커는 현실에서 폭력을 조장하는 영화인가?
조커의 폭력성은 쟁점이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서의 인정 욕구가 자신의 재능이나 사람들의 선의가 아니라 지하철에서 충동적으로 당겼던 방아쇠에서 충족되기 때문이다. 아서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거울 앞에서 김치, 치즈, 스마일을 할 필요가 없다. 동료와 사람들 앞에서 즐거운 척, 괜찮은 척할 필요가 없다. 아서가 더 이상 '그런 척하지 않기'로 자신을 내려놓자 그의 인정 욕망이 완벽히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현실은 다르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 극장이나 거리의 어디선가 울려 퍼질지 모를 총성을 경계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역린은 있다.
'역린'은 황금 휘장을 두른 왕에게만 있지 않다. 상대를 향한 비판이나 판단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섣부른 판단은 더욱 그렇다. 조커에서처럼 극단적인 상황, 총탄과 비수 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커는 생방송 중에 자신을 멸시하는 사회자(머레이, 로버트 드니로 분)를 향해서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 기택이(송강호 분)가 박사장(이선균 분)을 죽이는 이유도 비슷하다. 콤플렉스라는 역린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콤플렉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광대에서 광기의 조커로, 잘못은 누구에게 있을까?
아서는 조커로 각성하기 전까지는 계획적이거나 주도 면밀하지 않다. 단지 직장에서 거리에서 자신을 억압하던 이들에게 충동적인 분노를 표출했을 뿐이다. 그의 언행은 선동적이지도 정치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고담시의 어두운 상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따른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였어"
사람들은 순진했던 아서가 조커로 각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다. 하지만 아서를 광기의 조커로 만든 이들을 향한 비난은 당연할까? 아서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동료가 총을 준다고 총을 받을 사람이 있을까? 아이들이 있는 곳에 총을 가져 올 사람이 있을까? 아동학대를 당했다고 해서 모두가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를까?
이 모든 비극이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 벌어진다면, 내 품에 총이 있을 때 누군가 나의 소중한 것을 뺏으려 한다면 나는 그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을까?
'훌륭한 영화는 극장을 나서는 순간 새로 시작된다.' 어느 영화 평론가가 했음직한 이 말은 존재와 인정 욕구를 향한 우울한 묵시록인 조커에도 해당된다. 이제 히스 레저의 '배트맨 다크 나이트'를 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