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도 그린다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공부]
2025년 4월 11일
1. 원문장 - 최인호 <문장의 무게>
문장은 무겁다. 여백이 있기 때문이다. 여백은 문장의 존재 근거다. 그것은 문장을 품은 산이며 바다이자 우주다. 그 속에는 태초의 시간과 공간이 있고, 눈앞의 경험과 감각이 녹아 있으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별빛들이 숨어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느끼고, 상상하며, 곱씹는 사람들 앞에만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단어들의 연결이 무조건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며, 문장이라고 반드시 여백을 가지는 것 또한 아니다. 아무리 많은 단어를 연결한다고 해도 문장에 무게가 없다면, 그것은 여백을 갖지 못한 하나의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여백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처럼 말이다.
2. 나의 문장
그림은 나의 의지로 그려진다. 그림을 그리면서 여백도 그린다. 여백을 어찌 그린다는 것인가. 풍경화에 여백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부러 여백을 만든다. 일부를 생략하고 그린 듯 그리지 않은 듯이, 저기는 있고 여기는 없는 여백을 그린다.
원래 여백을 좋아한다. 사물. 풍경에는 여백이 없고 항상 무언가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사물과 풍경을 단순화하여 여백을 그냥 만들어 그린다. 여백은 그냥 빈 상태인데 무엇을 그린다는 것인가 하겠지만 그 조차도 내가 생각하는 한 부분인지라 그린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대단히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도 아니고, 취미 삼아 그리지만 나만의 감성이 있다. 풍경을 그리다 보면 의도치 않아도 여백이 생긴다. 가득 찬 빡빡함이 싫기 때문에 무엇을 그리든 생략하고 그리는 게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이런 스타일은 어려서도 그러했다.
욕심 없는 그림을 그린다고나 할까
표현은 언제나 담백하게 빈 공간이 있어야 비집고 들어갈 틈이란 게 생길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인생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빡빡하고 바쁘게 살아오다 보니 마음에 여백이 없어서 늘 시간에 떠밀려 살았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정신없이 달려오다 보니, 어느덧 세월은 나를 인생의 중반부에 데려다 놓았다.
나는 무엇을 남기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크게 안 좋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뭔가를 이루지도 못했다.
그나마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신의 자리를 잘 잡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내가 그린 나의 일상에는 여백이 없었다.
말 못 할 사연에는 덧칠을 덕지덕지하여 나타나지 않게 빽빽하게 그렸다.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물을 타서 희미하게 한구석을 옅게 그려 여백을 남기고 그 위에 나의 낙관을 찍어야겠다.
틈틈이 남긴 여백에서 '내가 그래도 잘 살고 있구나' 하는 흔적은 남기고 싶다.
난 나의 꽉 찬 마음에 여백을 만들고,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욕심껏 채우고 싶다.
나머지 비워 둔 여백에는 숨구멍을 만들고, 남은 자리는 그냥 여백으로 남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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