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우연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새벽 3시 출발!
오대산 산장에서 친구들과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일찍 간단하게 숭늉을 끓여서 먹고 간식을 챙겨 헤드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비로봉으로 출발한다. 적멸보궁을 지나 가볍게 정상에 도착하니 꼭대기에는 눈이 허리까지 묻힐 정도로 쌓여있었다.
비로봉 정상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이며, 나무에는 상고대(서리꽃)가 맺혀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어둠 속에 빛나는 하얀 설경과 함께 청량한 겨울 찬공기와 하늘과 끝없이 이어진 능선. 그 위로 내려앉은 순백의 풍경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봄에는 각종 산나물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약재로 쓰이는 것도 많고 정상에서 동피골 쪽으로 방향을 잡고 조금만 가면 자연산 곰취가 엄청 많다.
밥과 고추장 된장만 들고 올라가서 연한 곰취를 뜯어서 쌈을 싸서 밥을 먹으면 꿀맛이었던 추억이 떠올라 입맛을 다져본다.
그 시절이었으니 그게 가능했지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항상 자주 오던 곳이니 그리 어렵지 않게 왔는데 동대산으로 넘어가려니 러셀을 하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아직 그곳으로 향한 사람이 없었지만 친구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와서 힘이 달리지만 나선 이상 포기할 수 없다.
한참을 가다 보니 날이 어슴프레 밝아오고 저 멀리 사람들의 소리가 웅웅거리듯 작게 들려온다.
그럼에도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멀리서 희미하게 소리만 들릴 뿐이니 길이 나 있을 리가 만무하여 가도 가도 보이지 않는 길을 드러내기 위하여 눈 속에 묻힌 길을 밟으며 러셀을 힘차게 해 본다.
얼마쯤 가다가 누군가 산이를 불러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학교 동창이다.
졸업하고 본 적도 없고 그렇게 친했던 친구도 아니었던지라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데 아는 체를 하니 뭐라 불러야 할지 난감하다.
산꼭대기에서 동창을 만나다니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산악회를 쫓아서 왔다고 한다.
"여기서 보니 더 반가워 조심해서 등반해"
"그래 너두"
일행이 있어 지체할 수 없어 그렇게 서로의 안전등반을 당부하다가 문득 '저 친구가 우리 반이었던가 그랬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세상 참 좁다' 생각하면서 가던 길을 계속 재촉한다.
반대편에서 산악회가 그나마 길을 내주어 그때부터는 조금은 수월하게 산을 즐기면서 등반을 할 수가 있었다.
산행을 하다 보면 가끔 아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고, 몰랐던 사람들과도 인연이 이어지기도 한다.
산은 그렇게 사람들을 힘들게도 하고 때로는 위협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새로운 만남으로 연결시켜 주어 산행을 즐기게 해주기도 한다.
산 다니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고 했던가! 아무튼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과 같지 않게 옛날에는 산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웠다.
높은 곳까지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찐 등산객들 뿐이라 야간에는 더욱 사람을 보기가 쉽지가 않았었다. 자연 그대로의 산을 즐길 수 있어 좋았던 시절이었다.
힘들게 러셀을 하고 바위를 만지고 나무를 쳐다보며 툭 치고 입을 벌리고 서 있어 보기도 하면서 산행을 즐기다가 하산해서 생각지도 않게 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원래 산에 다니면 배가 잘 안 고픈데 그날은 러셀을 해서 그런지 몹시 허기가 졌다.
그러던 차에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고, 그들은 마침 밥을 먹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웬일이야 오늘 일정이 여기였어? 여기서 보니 반갑네 밥 좀 줘”
그러자 그 친구들은 “웬일이야 밥을 다 찾고”하면서 라면을 끓여준다.
“대체 언제 온 거야 우린 지금 왔는데”
“어제저녁에 와서 새벽 일찍 올라갔다 오는 길이지”
“눈이 많아서 어떻게 산행했대?”
“아무도 밟지 않아서 좋더라 물론 러셀을 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올라가 봐 우리가 길 닦아놨어”
“우린 정상까지 못 가 사람들이 적멸보궁까지만 가고 싶다고 해서 안내하고 내려올 거야”
“그렇군 아쉽네 설경이 멋진데”
친구들이 끓여준 라면을 맛있게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허기를 면하고 그제야 눈이 바로 떠졌다.
인연이란 것이 참 묘하다.
모르던 사람들이 산에서 만나 이렇게 친근하게 서로를 챙길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속세에서 만났다면 낯가림이 심한 산이는 절대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밥 달라는 말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지 암! 그렇지만 산은 내향성을 옅게 희석시키고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품어 줄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산은 가만히 있지만 사람들은 그 산에 기대어 인연을 만들고 삶의 에너지를 보충한다.
새벽의 칼바람과 눈 속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길을 내어준 오대산은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그렇게 산으로 맺어진 인연은 30년 동안이나 이어지고 있다.
끊어진 인연도 있었지만 그들의 기억은 그들과 만났던 그 산에만 가면 다시금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들이 어려움을 이기고 잘 살고 있는지. 또 어떤 시간을 보내며 산속 품을 찾고 있는지. 어쩌면 오다가다 우연히 어느 산에선가 마주쳤을지도 모르겠지만 산은 알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흘러간 인연은 다시 잡을 수 없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인연의 무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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