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초록으로 물든 계곡으로 빠져들며 '아윌비백'

인생이란 거대한 늪. 빠른 시간의 흐름처럼 빠져든다

by 그리여

처음 입사를 하고 모든 것이 낯설었고 서울이 익숙하지 않았던 산이는 배우고 익히며 직장에 적응하여 나갔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선배들이 있어 어렵지 않게 근무할 수 있었다. 친분이 쌓이니 편안해졌고, 회사에서 하는 모든 행사는 근무의 연장이라는 선배와 다른 부서 직원들과 야유회를 떠났다. 큰 차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려 속리산에 도착했다.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사람들이 덜 붐비는 시간대에 와서 뭔가 공기가 상쾌하고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산을 오르다가 바위에 앉아 멋진 포즈를 잡고 사진도 찍어본다. 점심을 먹으려 계곡에서 돗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시끌시끌 정답게 담소를 나누고 맛있는 밥을 나누어 먹었다.


입사동기가 사진을 찍어 달라고 계곡물 중앙에 있는 바위로 오른다. 산이가 카메라를 들고 동기를 찍어 주려던 순간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 빌린 카메라를 빠뜨리지 않으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카메라 든 팔을 머리 위로 쭉 뻗어 올렸다. 팔이 부욱! 하고 긁히는 느낌이 났지만 아프다는 생각보다 카메라의 안위가 걱정이 되었다. 물살은 빠르고 생각보다 깊었기에 디딜 곳이 없던 발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수영은 못하고 어찌할 줄을 몰라 식은땀이 났다.


마치 터미네이터에서 아널드슈워제너거가 엄지를 척 올리고 용광로에 들어가며 외치는 대사 "아윌비백" 하는듯한 자세가 나왔다. 실제 대사는 '굿바이'라는데 어찌 되었든 용광로에서 탈출할 것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찰나의 순간에 산이는 무의식적으로 팔을 쭉 뻗었다. 그 모습을 보던 과장님이 바위를 잡아야지 위험하게 뭐 하냐고 하면서 얼른 달려와 손을 잡아주어 더 깊이 빠지지는 않았다. 결국은 탈출했다.


야유회에서의 일은 두고두고 직원들에게 화기애매한 얘깃거리가 되어 소소한 웃음을 선사했다. 신입들이 만든 에피소드는 점심식사 후 나른한 오후 졸린 눈을 비비는 무료한 시간을 메워주는 윤활유 역할을 한참동안 했다.


"아윌비백! 카메라"


차가운 물에 빠지면서도 카메라를 사수했기에 그 후로도 많은 사진을 추억으로 남겼다. 카메라가 귀했던 시절인지라 자신이 빠지는 것보다 빌린 카메라가 빠지는 게 더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화양구곡에서 얼룩무늬 돗자리를 깔고 수박을 쩌억 쪼개어 먹던 기억도 생생하다. 여름 야유회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었다. 차가운 계곡. 힘차게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는 맑은 물을 보고 있으면 더위가 확 하고 저 멀리 달아나는 듯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산이는 친구와 다시 속리산을 찾았다. 속리산은 한여름이면 산 전체가 진초록으로 물들었다. 비 온 뒤에는 짙은 녹음이 공기 중에 젖은 풀향과 흙냄새를 흠뻑 머금고 있었고, 숲길은 안개에 살짝 젖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왕봉을 비롯한 주봉 주변에는 산수국과 야생화들이 피어나 있고, 계곡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숲을 채운다.

자연과 사람이 정겹게 어우러져 있고, 계곡 물소리와 함께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 풍성한 여름의 정경은 법주사의 청아한 풍경소리와 함께 기억 속에 한 폭의 풍경화로 남아있다.


진초록으로 물든 계곡에는 도시의 열기를 피해 올라온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플라스틱 통에 담긴 수박, 삶은 감자, 미숫가루 냄새가 공기 중에 흩날렸다. 아이는 발끝으로 물장구를 치며 웃었고, 아버지는 시원한 계곡물에 소주병을 담그며 “이 맛에 산에 오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해 질 무렵이면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이 붉게 물들었다. 그늘진 골목엔 뻐꾸기 울음이 내려앉았고, 작은 산장 앞마당엔 쑥 모기향이 피어올랐다.


밤이 되면 방 안에는 풀벌레 소리만 가득했다. TV는 잘 나오지 않았고, 대신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야기를 하고, 웃고, 잠들고… 그렇게 그 여름은 천천히 지나갔다.


속리산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지만, 그때의 여름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나무는 여전히 푸르고, 물소리는 청아하고 계곡은 깊고 지만 그 산속 계곡에서 뛰놀던 우리들. 빛바랜 여행가방 속 필름카메라는 이제 추억 속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가끔은 그 여름을 다시 걷고 싶다. 땀이 나도록 걸어도, 물 한 모금에 더위가 다 씻겨 나가던 그 산길을.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좋았던. 아무 약속 없이 머물던 그 시절 속리산의 여름으로.


산이는 친구와 그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는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 더 빨라진 시간을 의식한다.


시간이 변한 게 아니고 산이가 한층 더 인생이란 늪에 깊게 서서히 빠져들고 있어서 그런 것이지 않을까

나이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는 말을 실감하며 오늘을 소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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