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놀람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던 그해 비가 와도 산행을 포기할 수가 없어 가까운 곳으로 나섰다. 우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마치 음악처럼 일정하게 들린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고 그저 좋은 그런 산행을 친구와 떠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는가. 없는 시간 쪼개가며 같이 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비가 많이 오지는 않았지만 일정하게 쏟아지니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자박자박 발길이 닿는 곳마다 고인 물들이 튕긴다.
벼락이 내리치던 오봉의 한 봉우리를 그 옆 봉우리에서 보며 놀라고 있을 때 누군가 소리쳤다.
"목걸이와 귀걸이 하신 분은 얼른 빼세요"
액세서리를 하고 온 사람들은 황급히 뺐다. 벼락이 떨어진 옆 봉우리를 보니 소나무가 까맣게 탔다.
가까이서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날은 비가 오락가락하고 날이 몹시도 흐려 있었다.
잿빛으로 찌뿌둥하던 날. 구름은 기어이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물을 쏟아부었다. 참았던 시간만큼 아우성을 쳤다.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하얗고 선명한 선이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며 우르릉 번쩍 세상이 뒤집히는 듯이 보였다. 두려워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뒤엉켜서 내려가고 있다.
늘 비를 피해서 다녔기에 이렇게 많은 비가 쏟아지고 벼락이 떨어지는 광경은 처음으로 보았지만 두렵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장엄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겸손한 마음으로 산을 오른다. 오봉으로 오르는 길은 설렘을 주었다. 비옷을 입고 산행을 하는 게 얼마만인가. 눈을 맞으며 산행을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많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다.
서서히 비가 잦아들고 하늘도 조용해졌다. 비에 젖은 산봉우리는 운무가 끼어 뿌옇게 보였고, 첨벙첨벙 바닥에 고인 물을 밟으며 걷는 길은 또 다른 음악처럼 정겨운 소리로 들렸다.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감상에 젖어서 비가 와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물에 젖기 전에는 비를 맞지 않으려고 기를 쓰지만 한번 젖으면 이내 모든 걸 내려놓고 해방감에 마음껏 비를 맞는다. 내려놓으면 편하다.
축축해진 등산화도 물이 흘러내리는 우비도 다 낭만적으로 생각되었다. 우비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친구와 조잘조잘 즐겁게 내려왔다. 도봉산에서의 등반은 비로 인하여 어쩌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언제나 아름다운 산이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친구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힘든 곳을 올라가냐 다시 내려올걸 왜 기어이 올라가냐고 한다.
"너는 왜 매일 밥을 먹지"
"그야 먹어야 사니까"
"마찬가지야 산도 그래. 가야만 살 수가 있어"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여깄지 너도 언젠가 산에 가면 내 기분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언제 시간 나면 나도 데리고 가줘라"
"물론이지 언제나 가능해 시간 한번 잡아봐"
사람은 누구나 힘들어도 한 가지씩은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붓는다. 산이에게 산은 그런 곳이었다. 누가 오라는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언제나 활기가 생기고 숨통이 트인다. 같이 가자던 그 친구와 같이 산을 올랐다.
"넌 산에서 볼 때 정말 다른 사람 같아"
"그래?"
"응 뭔가 화사하고 빛이 나"
"고마워! 너도 좋아하는 걸 하면 그렇게 될 거야"
"그래도 산은 힘들다"
"가다 보면 매력에 빠질 거야 풍경을 즐겨봐 나무도 만져보고"
그렇게 산을 오르던 초보 산행 친구는 그 이후에도 몇 번을 더 같이 산행을 하였다. 산행을 하다가 만난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 친구도 어느덧 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산이가 회사를 옮기면서 바빠서 연락이 뜸해지고 멀어지니까 그 친구는 산에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고 했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 영 재미가 나지 않았나 보다.
산은 언제 누구든 오는 사람들을 조용히 품어준다. 그 사람이 괴롭든 즐겁든 슬프든 외롭든 그 어떤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요동치더라도 말없이 조용히 품어주고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기를 기다려 준다.
누구나 길은 알지만 그 길을 용감하게 나아가기를 망설이는 순간이 있다. 그 길에서 만난 그 어떤 인연들이 손을 끌어주고 동행을 해 줄 때 인생은 한결 더 풍성해진다.
같이 갈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서 지친 그들이 찾아와서 활기를 충전해서 가기를 기다리며 시시각각 다른 옷을 입으며 사계절 멋진 모습으로 그 자리에 우뚝 솟아있다.
90년대를 함께 한 그 산이 사람들에 의하여 변하고 몸살을 앓고 있지만, 그래도 산이 있기에 사람들은 또 이렇게나 즐겁게 즐기며 추억을 만들고 소중한 인연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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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이를 품은 산은 20화로 맺음 합니다.
그동안 구독하여 주신 작가님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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