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만난 끈끈한 인연들
해마다 3월이 되면 시산제를 한다고 산악회는 어수선하다. 먹거리를 장만하고 사람이 모이면 산으로 향한다. 산악회 회장님의 초대로 산이는 친구와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서 시산제에 참석해 봤다.
90년대 3월의 유명산 시산제(始山祭)는 억새는 지고 다소 스산하고 황량한 벌판처럼 건조함이 있었지만 햇살을 받고 바람을 즐기는 사람들의 활기로 채워져 정겨운 분위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시산제는 산을 찾는 이들이 한 해의 무사 산행과 안전을 기원하며 지내는 의례로, 특히 전국의 산악회들이 중요하게 여긴 전통 행사였다.
유명산은 경기도 가평과 양평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도권에서 접근이 쉬워 90년대에도 인기 있는 산행지였다. 3월의 유명산은 겨울의 잔설이 능선 어귀에 머물러 있고, 나뭇가지엔 아직 새순이 들지 않아 앙상하지만 그 고즈넉함 속에 봄기운이 새싹처럼 솟아오르던 시기였던지라 바람은 차가웠다. 기분 좋은 바람의 차가움. 해가 뜨면 점차 온기가 돌았다.
유명산 중턱의 평탄한 공터에서 시산제를 지낸다. 지형을 잘 아는 베테랑 산악회원이 먼저 올라가 좋은 자리를 잡아놓았다. 제상에는 돼지머리, 북어, 과일들이 올라가고 소주, 막걸리도 빠지지 않았다. 돼지머리 입에 꼽은 지폐 몇 장이 눈에 들고 절을 하기 전에는 바람 소리만이 들린다. 산이 좋아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 인연이 안전하게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산악회 회장님이 대표로 헌주(獻酒)를 올리고 절을 올리면, 모두가 두 번 절하고, 한 번 묵례를 한다. 주로 중장년층 산악회원들. 그래서 그런가 먹거리는 기가 막히게 많이 챙겨 오고 맛도 좋았다.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온 회원, 직접 담근 김치, 술안줏거리로 가지고 온 노가리구이. 도토리묵무침. 막걸리 한 잔에 걸걸한 웃음꽃이 피어오르고 왁자지껄하고 수선스러운 대화에 산이 들썩거리며 시끄럽다. 그 와중에도 지난 산행 이야기와 계획이 오간다.
"다음 산행은 어디로 갈까 봄이니까 따뜻한 남쪽으로 갑시다. 어이 거기 조용해봐"
"이번에는 젊은 사람들도 같이 가면 좋겠는데 어떤가?"
"거 자네들 술은 그만 먹고 어디가 좋은지 말 좀 해보게나"
"의견들 내 보게 젊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면 좋아하려나"
"어디든 가세! 자자 건배"
회장님과 간부들의 안타까운 의견만 오가고, 지방방송들은 켜진 채로 거나하게 취기가 올라 집중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에서도 산이와 친구들은 맛난 음식들로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20대 젊은 청춘들이야 산에 가면 그저 단순한 먹거리만 챙기는데 어르신들이 많은 산악회는 갖가지 먹을거리들이 잔칫집처럼 푸짐하다. 그러다가 ‘산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다 함께 손뼉 치며 흥을 돋운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필름 카메라를 사용했고, 사진은 한 달 후 모임에서야 확인하고 더러는 찾기도 하고 더러는 보기만 할 뿐이었다.
90년대의 유명산 시산제는 단지 안전 기원을 넘어, ‘같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다시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일종의 산행 의식 같은 것이었다.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드물던 시절, 유선전화로 연결하여 만나도 약속은 칼같이 지키던 이들은 산에서 끈끈한 만남을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결혼을 하고 한동안 산에서 멀어지면서 정겨운 산추억이 많이 잊혔다. 지금도 시산제들을 하고 계시려나. 눈이 크다고 산이를 이뻐하시던 눈이 작은 부회장님. 정운은 술을 잘 먹는다고 좋아하시던 코가 빨간 회장님. 그 어르신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진다.
찬란했던 20대 산을 열정적으로 오르던 그 친구들은 또 잘 지내고 있는가 물론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사는 친구들의 안부는 알지만 잠깐씩 스쳤던,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산은 알고 있으려나
시간은 기억을 먹어버리고 더러는 용량과다로 뇌리에서 버려졌지만, 그래도 가끔은 생각나는 그때의 따뜻한 감성과 우리를 품어주던 산을 오르던 멋진 순간들은 필름에 찍힌 검은 그림자처럼 어슴프레 남아있다.
요즘은 유명산에 오르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서울 롯데타워가 보인다. 탁 트인 곳에서 바라보는 시원한 풍경에 가슴이 탁하고 터지는 듯한 상쾌함을 느낀다.
#산악회 #시산제 #유명산
#감성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