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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일해서 열 사람을 먹여 살린다

일의 가치와 무게

by 그리여

지금은 시간이 흘러 희미해졌지만 그때의 힘겨운 고통은 아직도 몸에 남아있다. 시부모님이 농사를 시작하시면서 주말마다 시골로 내려가서 도와주면서 거의 쉬는 날이 없도록 일을 했다. 거두어들이는 작물이 많아지니 일이 갈수록 늘어났다. 평일은 직장 다니고 주말에는 농사를 도와야 하니 고단함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래도 연로하신 시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계시니 모른 체 할 수 없어 남편과 나는 주말마다 시골로 달려가는 서울 농부가 되었다.


밭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태양이 뜨고 지고 하는 동안 작물들은 몇 번의 자리바꿈을 하고 다른 일거리들로 채워졌다. 보통 작물을 심어서 식탁에 오르기까지 3개월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달에 맞게 여러 작물을 심어서 거두어 들일수가 있었다. 태양이 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김장철이 다가오면 밭을 갈아엎고 배추와 무 각종 양념거리들을 심는다.

그러면 배추는 무럭무럭 그냥 자라는 게 아니고, 벌레도 잡아줘야 하고 물도 줘야 하고 좀 자라면 묶어도 줘야 하고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다.

그렇게 자란 배추를 뽑아서 다듬고 무도 뽑아서 다듬고 온통 일거리들이 즐비하다.

손질하는 과정이 많으니 해가 지도록 일하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일을 해야만 했다.

김장을 하기 위해 쌓아둔 배추는 300 포기가 넘었다. 일일이 손질하고 소금으로 절이고 뒤집고 이 모든 과정을 하고 나면 그야말로 녹초가 된다.

먹는 입은 많은데 일하는 손은 대여섯 명이다.

김장거리들을 손질하여 김장을 시작하고 허리 한번 제대로 못 펴고 종일 일하고 휴가까지 내서 그 일에 매달린다. 먹는 사람은 먹기만 하고 일하는 사람은 일만 한다.

그날도 지쳐서 켜켜이 배추 속을 넣고 있는데, 어머님이 일 많이 시킨 게 미안하셨던지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일해서 열사람을 먹여 살린다고 한단다 힘들어도 해야지"


겉으론 웃었지만 무심히 던진 그 말씀이 왜 그렇게 서운하던지. 그래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일만 하는데 남편이 옆에서 눈으로 미안해하면서 조용히 위로해 준다. 그렇게 일을 하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밥을 하고 차리는데 정작 나는 숟가락 들 힘이 없었다. 진이 빠진 뒤라 손이 덜덜 떨려서 숟가락질이 잘 안 되었다.

그때 어머님이 또 한마디 하셨다.


"아범은 피곤하니까 쉬고, 어멈이 오늘 운전해서 서울 가라. 여자는 남자보다 강하다"


순하던 남편이 그 말을 듣자 버럭 화를 내며 처음으로 대꾸했다.


"엄마는 그게 할 소리야. 직장 다니면서 쉬지도 못하고, 주말에는 농사일하고 집에 가면 애들 키우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겠어"


그러자 어머님은 "난 그냥.. 여자는 잘 참으니까" 하고 얼버무리셨다.


그랬다 난 잘 참았다. 그래도 그런 말은 듣기에 서운했다. 그 말이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가슴에 깊게 남아있다. 요즘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면서 아이들과 외출을 많이 하게 되었다.


딸들은 "엄마는 일만 했으니 이제는 쉬는 것도 배워야지 왜 쉬는 법을 몰라"라고 한다. 딸들 덕분에 전시도 관람하고 영화도 보고 그렇게 다니면서 해보지 않았던 것에 발을 들였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평일 대낮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전시장 예매하려면 자리가 없고,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많아서 겨우 내린다. 식당에는 또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지 맛집은 웨이팅이 기본이다. 정말 오늘이 평일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낮에도 놀고 있는데 일은 누가 하고 뭐 해서 먹고살까. 나는 어느 정도 나이라도 있지, 젊은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돌아다니는데 이대로 괜찮을까? 나는 저 나이에 이 시간에 놀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괜찮을까? 저 젊은이들이 일해야 할 곳이 어디일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저들도 우리처럼 연차나 잠시 휴직하거나 그렇겠지'라고 스스로 답을 정해놓고 만다.


일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노는 방법을 잘 모른다. 아파서 쉬는 순간에도 일을 하지 않으니 죄를 짓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뭔가 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몸이 아프고 힘들수록 운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비축한다.


건강한 육신은 정신을 갉아먹지 않는다.


일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임을 안다. 젊은 청년들이 더 많이 일을 할수록 건강한 사회이기에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지도록 우리 기성세대들은 더 고민해야 할 숙제를 끌어안고 있다.


한 사람의 노고로 열사람이 먹고살게 아니라, 열사람이 일해서 다 같이 잘 먹고 즐기며 잘 사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노쇠하여 일을 하지 못해서 못하는 것이지, 일자리가 없어서 못하는 사회가 아닌, 일거리가 넘쳐 나는 그런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꿈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사회를 꿈꾸며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명절이 다가오면서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그 말이 왜 그렇게도 생각이 나는지. 올해도 명절에 맛난 음식을 하고, 맛깔스러운 김장을 해서 가족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하는 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따가운 햇살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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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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