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던 아이들
외며느리로 명절마다 늘 바쁜 엄마 때문에 아이들도 덩달아 고생했다. 장보고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명절 연휴 3,4일 빨간 날 내내 음식하고 손님 치르고, 또 음식 하고 또 치우고 집에도 못 가고 시댁에서 그렇게 지내다 보니 애들은 연휴 동안 어른들 오시면 인사하고 요청에 등 떠밀려 재롱도 부리며 즐거움을 줘야 했고, 그렇게 시댁에서 꼼짝 안 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왜 엄마만 일해
딸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엄마가 제일 어리니까 하는 거야
하루 종일 상이 접힐 틈이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먹을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도 신기한데 아이눈에는 얼마나 진기한 광경이었을까
남편과 나는 명절만 되면 열흘 전부터 명절증후군을 앓았다. 외며느리인지라 나는 남편을 '명절동서'라 불렀다. 열동서 부럽지 않게 보조를 잘해 주었다. 그렇게 20년 넘게 명절날엔 바깥을 나가본 적이 없다. 물론 친정도 명절이 지나고 나서야 갔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손님이 줄고, 친인척들도 자식들이 장성하면서 각자 손님치레를 해야 하니까 모이는 시간이 확 줄어들었다. 덕분에 명절에 여유가 생겼다.
갑자기 시간이 주어지니 어떻게 보내야 하나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서울근교 나들이를 갔는데, 명절인데도 여유 있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만 집에서 주야장천 명절을 보냈나 봐
그러게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걷고 있는데 딸이 말한다.
엄마! 난 명절에는 사람들이 우리처럼 다 집에서만 있는 줄 알았어
나도 놀랍고 별천지를 걷는 기분이야 딸
아기 때부터 그것만 봤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생각해 보면 아이들도 명절엔 몹시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막내도 명절이 다가오면 몸이 좀 아프다고 한다. 나야 내가 선택한 인생이기에 시부모님께 최선을 다해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지만,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내 포대기안에 업힌 아기가 되어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었다.
어쩌면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아들과 며느리 이제는 좀 덜 힘들게 살라고 만들어준 시간을 덤으로 받은 느낌이다. 아직도 여전히 아파서 잠 못 이루는 명절증후군에 힘들지만 그래도 이제는 명절이 여유로워졌다. 주변도 보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보드도 하고 닌텐도도 하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가지지 못했던 즐기는 시간이 더 주어지게 된 거다.
지나가보면 아름답고, 한발 뒤에서 보는 시골은 낭만으로 가득 차 보인다. 명절 또한 그런 것 같다. 허리 한번 펼 틈도 없이 음식하고 손님 치르던 그 시간도 흘러간 역사 속의 한 장면처럼 이제는 웃으며 추억하는 시간 속의 뒤편에 머물러 있다. 아픈 몸이 그날을 잊지 못하고 내 몸을 공격하고 있지만 그래도 좋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여유롭고 넉넉한 한가위가 되어 보름달처럼 가슴이 벅차오른다.
돌이켜보면 '이왕이면 즐겁게 하자'라고 생각하고 오시는 친척분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하고 진심으로 손님맞이를 했던 명절은 언제나 웃음꽃이 문밖으로 뻗어나갔고, 그 틈에서 아이들은 놓치지 않고 우물 안으로 보름달 같은 밝은 사랑을 끌어들여 품었고, 우주만큼 넓은 배려와 다정함을 주는 아이로 성장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자식 노릇을 하는 동안 아이들은 그 모습을 그대로 보고 닮아 가고 있었다. 등만 보인게 아니었다. 명절이 힘들었던 만큼 돈으로도 못 사는 더 값지고 큰 것을 얻어 감사했다.
나이를 먹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인생이란 것이 1에서 10까지 한고비씩 넘기는 거라면 4 고비까지 힘겨웠던 날들을 현명하게 넘기고, 4 고비 이전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순간을, 이제 5 고비를 넘어가다 보니, 몸이 아픈 만큼 마음은 좀 편해진 아이러니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한 뼘 더 큰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내게도 이런 명절을 맞이하는 날이 오다니, 믿기지 않는 꿈같고 뭔 복인가 싶다.
우물을 벗어나 그 안에서 차곡차곡 쌓아놓은 밝은 기세를 끌고 나온다.
집 밖에서 바라보는 명절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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