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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상 속에 피어난 행복

길들지 않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by 그리여

외삼촌은 항상 말씀하셨다. "구슬이 니는 누임 어렸을 때랑 똑같다. 니를 보면 누임 어렸을 때가 생각난다" 그랬다 여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성격이 활달하고 엄마와 많이 닮았다. 목청이 크고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다가도 금방 돌아서면 헤헤거려서 엄마가 좋아하시고, 늘 같은 성격 때문에 투닥거리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엄마의 천적을 엄마가 낳은 듯했다. 덕분에 집안은 늘 활기에 찼고 시끌벅적 생기가 넘쳤다.


동생은 선머슴같이 생기가 넘치다 못해 늘 팔딱팔딱 뛰는 생선같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기 고집이 있어서 엄마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았다.


“뒷마 애들이랑은 어울리지 마래이 농띠들만 모여있대이”

“몰라 내 친구야. 내가 알아서 논다카이”

"마한거 저건 하지 말라는 건 기어이 한대이 누구 닮아서 저러는동"

"엄마랑 똑같다고 하던데 누구 닮겠노"


동생은 엄마 말은 듣지 않고 한 귀로 흘리고, 놀지 말라는 그 애와 절친으로 더 신나게 어울렸다. 보이시한 동생은 엄마처럼 사교성이 좋고 친구들이 많아서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3살 아래인 동생은 내게는 좋은 친구와 같았다. 낯을 많이 가려 가게도 잘 못 가는 나 대신에 가게도 잘 가서 물건을 사 오고, 나와는 다르기에 나는 더 이뻐했고 활달한 게 보기도 좋았다.

어렸을 때는 내가 늘 데리고 다니면서 놀고 공부도 가르쳤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끔은 아버지 친구가 놀러 오셔서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아 자네 딸을 우리 딸이 너무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녀. 큰일이대이 머슴아도 아닌데”

"그키 말일세 딸인데 어예 저렇게 선머슴 같은지 몰따"


내 동생을 오빠 하면서 좋아한다나. 여자인데도 여자한테 인기가 많았고, 남자애들도 좋아하는 애들이 많았던 동생은 엄마에게는 골칫덩어리였다.

둘이 싸우면 집이 항상 들썩였다. 그러다가 금방 또 하하 호호하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나는 말수가 적어서 엄마는 항상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동생은 투명하게 보여서 좋다고 했다. 집을 활기차게 해주는 동생이 늘 고마웠다. 나는 절대로 하지 못할 일을 동생은 너무나 잘하고 있다. 그랬기에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엄마와 아버지는 때로는 동생에게 화풀이하기도 했고, 동생은 그게 또 서운하여 툴툴거리기도 했다.

나는 어려운 맏딸이고 동생은 편한 딸이었나 보다. 한 번도 내게는 그런 화풀이와 투정을 하신 적이 없었다. 동생은 그게 또 그렇게 서운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가고 싶다는 학교를 못 가게 한 엄마에 대한 반항심에 공부도 대충 하고 그랬는데, 나중에 엄마가 "이제라도 니가 가고 싶은 곳에 보내 줄게 다시 공부할래?" 하는데도 필요 없다고 고집을 꺽지 않던 동생은 지금 자기 사업을 잘하고 살고 있다.

부모조차도 자기에게 도움을 안 주었다고 서운해하던 동생이었지만, 부모님과 같이 고생하고 자라서 그런가 말만 그러지 부모님께 잘한다.

결혼을 하고 어려운 신혼에 힘들어하던 동생을 엄마는 속 끓이며 마음 아파했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어 우리 동네로 오게 하였고, 시댁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로 인하여 아이가 생기지 않던 동생은 내 옆으로 이사 오면서 바로 아이가 생겨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조카가 지금은 군 복무를 마치고 어엿한 성인이 되어 동생에게 더없이 잘한다. 딸 같은 아들이라 애교도 많다. 아마도 동생을 닮은 듯하다.

엄마와 항상 투닥거리며 집안을 들었다 놨다 하던 동생에게 엄마는 심적으로 많이 의지한 것 같다.

나는 세 아이 키우고 시댁에 일이 많아서 힘이 들다고 거의 힘든 사정은 말하지 않으셨다.

내가 시골 가면 뭐든지 주려고만 하셨다.


“니는 왜 뭘 달라고 안하노 딴 집 딸들은 친정 오면 다 퍼가려고 한다는데”


엄마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큰딸이 서운했는지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말 안 해도 엄마가 다 챙겨주는데 뭘 더 달라고 해”


나는 재미없고 믿음직한 장녀였고, 여동생은 활달하고 편한 딸이라서 엄마는 가끔 투정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한 거 같다. 세월이 흘러 그때 일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동생이 고맙다.

엄마는 돌아가시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을 동생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없어도 니가 잘 챙기래이. 니 언니는 보살펴야 할 게 너무 많다. 니 밖에 없대이"


유언이 되어버린 그 말을 동생은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엄마에게 말하듯이 실천하고 있다. 가끔 동생은 “자기가 힘들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언니와 형부만 나를 도와줬어 “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이게 다 니가 잘해서 그런 거지 난 뭐 한 것도 없어"라고만 한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자매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렇게 서로 의지하니 정말 좋다. 엄마가 그렇게 길들이고자 했던 동생은 길들여지지 않았지만 길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탁하였던 일들을 잘하고 있다. 가끔 엄마가 보고 싶을 때는 동생을 보면 엄마가 그려지기도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어느 날 작아지셨을 때 우리는 무척 걱정을 하였더랬다. 그게 시작이었다. 에너지 넘치던 사람이 목소리가 작아지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우린 그걸 알았기에 마음이 아팠고, 늘 크고 창창하던 엄마의 목소리를 그리워했다. 아파서 기운을 차리지 못하며 누워있던 그 모습이 문득문득 생각나서 그 옛날 좋았던 그 시절을 되새기게 만든다. 그때는 몰랐던 모든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는지 엄마를 보내고 또다시 알게 되었다.


시원한 김치를 시시때때로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시고, 자글자글 된장찌개를 맛나게 끓여주어 밥 한 그릇 뚝딱하던 그 순간들. 우리가 시골 가면 항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지어주시고, 햇쑥을 뜯어서 절편을 만들어서 고소한 콩고물에 묻혀서 입에 넣어주시던 그 순간. 닭고기와 돼지고기를 양념하여 주물덕주물덕 뚝딱하여 숯불에 구워주시던 그날들이 그림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순간 속에서, 작은 일상들이 모여서 우리의 마음을 찰랑찰랑 얼마나 가득 채워주었는지. 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행복이 숨어 있었는지. 지금 보물 찾기를 하듯이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김장을 해서 시골 갈 계획을 하면서 엄마가 해 주시던 김치를 받아먹던 그 순간이 얼마나 좋은 날이었는지 또 새삼 깨닫는다. 그 누구도 나에게 김치를 해주지 않았다. 오로지 엄마만이 나에게 주시는 분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주는 사람이 되어 엄마의 전철을 밟고 있다. 이런 사소한 일상을 행복으로 기억하게 해 준건 오로지 엄마의 사랑이었다.


지나간 시간이 언제나 좋게만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있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삶이 좀 더 풍성하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아름다울 수 있었다는 걸 안다. 그것이 시간 속에 묻혀있는 작은 일상들의 힘이다.


지나고 나면 소중한 일들은 항상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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