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시킨 자식이 효도한다
엄마는 어떠한 풍파에도 굳건히 버티시며 우리를 키우셨다. 맡겨놓은 듯 돈 달라고 뻔뻔하게 덤벼드는 친척이 있었고, 우리 먹이기도 힘든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외면을 못하시고 그저 내어주셨다.
"엄마 육성회비 갖고 오래"
"있어봐라 내 장 봐서 주께"
사촌은 거르지 않고 육성회비를 제때 잘 냈는데, 우리 형제들은 항상 늦게 내어 재촉을 받고, 괜히 선생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친척의 성화에 못 견디고 돈을 내어주시고, 남은 게 없다는 걸 알기에 우리도 그저 묵묵히 주실 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어려서부터 돈을 벌어야 했던 가여운 둘째였고, 무능한 집안의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꾼으로 생각하고, 그저 자기들이 손 내밀 때 돈이나 주기를 바라는 한량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가엽게 여긴 엄마는 힘이 들어도 온갖 수모를 견디고 참아내셨다. 그걸 보고 자라면서 이해하기도 힘이 들었지만 왠지 이해가 되기도 하는 묘한 감정이 들었다.
엄마는 두뇌가 비상하여 항상 안주하지 않으셨고, 뭔가를 창출하는 쪽으로 재능이 있으셨다.
물건을 팔더라고 그냥 팔지 않았고, 2차 가공을 거쳐 파시기도 하시면서 그걸 찾는 단골들이 많았다.
나는 주판을 튕기며 엄마의 계산을 도와주었기에 장부를 보며 손익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외상 장부를 본 적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상을 해 갔는지. 그리고 대체로 외상값을 갚지도 않고, 또 외상을 해 간 물품들이 일일이 다 적혀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외상값을 갚으라고 크게 채근을 하지 않았기에 많은 손해도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라지만 사람들이 참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하지만 너나 나나 어렵게 살던 힘든 시기였기에 어쩌면 엄마는 떼일 것을 아시면서 주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덤으로 푹푹 주기도 하시고 마음씀이 호탕한 성격 탓에 손해를 많이 보시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덕을 쌓아야 한다. 손해 보는 듯이 살아야 니들이 나중에 다 복을 받는다”
엄마가 고생하시는 이유에는 항상 우리가 우선순위에 있었기에 혹여라도 우리에게 해가 될만한 일은 아무리 고되고 궁핍하여도 하지 않으셨다. 그랬던 엄마가 입버릇처럼 가르치시던 덕이 쌓여 우리들이 우애 있게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힘이 들 때면 엄마는 항상 뭔가 하나씩 취미를 가지셨다. 쉴 법도 한데 그냥 가만히 계시지 않으셨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스트레스를 푸신 것 같다.
어느 해는 고사리를 그렇게 열심히 뜯으려 다니셨다. 이 산 저 산 힘든 줄 모르고 돌아다니셨다.
고사리를 말려서 주기도 하고 다래순을 뜯어서 보내주기도 하셨다.
얼마나 맛있던지 이제 다시는 못 먹게 되어 아쉽다. 물론 얼마든지 마트에서 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때 엄마가 주신 것과는 다르기에, 추억과 가치를 버무린 그 맛을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어느 해는 수석을 그렇게 열심히 모으러 다니셨다. 사방팔방 수석이 많다는 곳은 다 다니셨다. 그 무거운 걸 들고 들어오시면서 힘든 기색이 없고, 얼굴에는 함박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 많던 수석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흐른 후, 물건을 정리할 때 주변 지인들이 탐을 내던 것은 나누어 주고, 이제는 화단에 조그맣게 그 옛날을 기억하며 장식되어 있다.
엄마의 취미 생활은 힘든 순간에 엄마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 듯하다.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랐으니 나도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성실함을 배우고 너그러움을 배웠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도 배웠다.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는 이미 많이 받고 살고 있었다.
비록 풍족하게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성실함을 자산으로 주셨기에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그것이 엄마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이었다.
열심히 한 생을 살아내신 엄마는 어떠한 보상도 용납지 않으시는 것처럼 온전히 비우고 돌아가셨다. 살아가면서 힘이 드는 순간이 오면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순간들을 견디셨을까.
엄마가 남겨 준 정신적 유산으로 우리는 견디는 법을 알았고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던 그 순간들을 보면서 왜 참고만 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손해 보는 듯이 살아라 그게 다 자식에게 복이 되어 돌아간다. 나 역시 자식을 키우는 엄마이기에 그 가르침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어 물리칠 수가 없었다.
찬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스산한 날이면 유난히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추운 집에서도 따스한 온기를 느꼈기에 불행하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힘든 순간이 오면 엄마의 삶을 답안지 보듯이 살짝 열어본다. 그러면 왠지 그다음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알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푸는 방식을 알려 주었기에, 답안지가 이미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몰라도 씩씩하게 풀어나가는 뚝심이 생겼다. 이게 가정교육인 건가
부자가 아니어도 옹색하거나 비굴하지 않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언제나 엄마의 고단한 등짝이 보였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고, 또 힘이 나게 하기도 했다.
고단한 그 어깨를 좀 더 주물러 주지 못해서 그런가 늘 뭔가 비어 있는 듯 허전하고, 안아주지 못했던 한 가지 잔상이 시시때때로 눈에 아른거린다.
삶의 의미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나답게 사는 것이 삶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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