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심연
장터에서 장사를 하실 때도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나 엄마는 한결같이 양은냄비를 연탄불에 올리고 매 끼니 따뜻한 밥을 아버지에게 해주셨고,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아버지 식성에 맞게 바로 한 생생한 김치를 끊기지 않고 하셨다. 엄마가 항상 부지런하게 김치를 하신 덕분에 우리는 한 번도 신김치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겨울에도 김장을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난 김치는 항상 금방 해서 먹는 것인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서울에 와서 김장이라는 겨울맞이 문화가 있고, 묵혔다가 먹는 것을 알았다. 남쪽이었던 친정은 오랫동안 김치를 숙성시켜 먹는 집이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해보니 엄마가 얼마나 수고로운 일을 오랫동안 했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김치는 어렵지는 않은데 시간이 걸리는 번거로운 반찬이기에, 많이 해서 먹으면 상관이 없지만 자주 해 먹기에는 부담이 있는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삼시세끼 매 끼니마다 갓 지은 따뜻한 밥과 찬을 아버지에게 해 드렸다.
아버지는 가난에 등 떠밀려서 희생된 둘째 아들이었다. 어려서 남의 집 더부살이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았다. 그것이 가족과의 정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았고,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를 은근히 멸시하였다. 가족도 같이 살지 않으면 남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그랬던가 고모들은 아버지를 힘들게 하였고, 큰아버지는 염치없이 시시때때로 맡겨 놓은 것처럼 돈을 요구했다.
엄마는 그 모든 걸 아버지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그래서 그랬나 말이 없고 조용한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우리를 앉혀놓고 족보를 알려주셨다. 가족들에게 멸시당하시며 당신의 근본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었나 싶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다 보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아버지의 되돌이표 말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쌀쌀한 밤거리로 나왔다. 별이 쏟아지던 그 차가운 겨울밤의 냄새... 아직도 잊히지 않던 짚더미 냄새가 나에게는 추억처럼 남아있다. 갈 곳이 없고, 부모님이 안 계신 친정도 편하지 않던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논에 쌓아둔 짚가래로 갔다.
겨울이라 춥기는 했지만 짚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물론 엄마가 옆에 있어 그랬으리라
별말 없이 하늘의 별만 헤던 그 밤이 세월이 흘러도 생생하게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고단한 처지를 온전히 이어받은 엄마는 그렇게 조용히 삭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은 어김없이 왔고, 우리는 또 그렇게 “뭐 하노 얼른 일어나래이 학교 안 가나” 엄마의 힘찬 기상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일어나서 학교에 갔다.
아버지는 어젯밤의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또 침묵을 하셨다. 해소되지 않는 마음 깊은 곳에 쌓인 상처받은 마음을, 막걸리의 힘을 빌어 한 번씩 쏟아내신 듯했다.
지난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을 한잔의 술로 들이키셨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아픔을, 때로는 말 안 듣는 아들 대하듯 하시며 잔소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측은한 자식처럼 보듬어주시면서 당신의 곤한 몸보다 더 보살펴 주었더랬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엄마만의 방식으로 살리고 계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것도 엄마가 그동안 아버지에게 해 드린 보약 같은 음식과 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천식이 심하셔서 밤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여 꼬챙이처럼 말랐던 아버지를, 엄마는 매번 도라지를 키워서 묵혔다가 손질하여 다려서 꾸준히 드렸고, 그 외에도 좋다는 것은 다 해서 먹게 하시어 그 고약한 천식을 정성으로 고치고야 말았다.
가끔 엄마가 했듯이 아버지에게 반찬을 해다 드리면 아버지는 금쪽이 같다. 드시기 싫은 건 절대 드시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자매는 늘 이렇게 말을 한다.
“엄마가 아버지를 금쪽이로 만들었어. 아빠! 이제는 엄마 없어. 매일 새롭게 반찬을 해 드릴수도 없으니 그냥 이렇게라도 잘 챙겨드셔야 돼요”라고 말하면,
“내 뭐라 카나 잘 챙겨 먹는다 걱정 마라”라고 말하신다. 다음에 가보면 드시고 싶은 것만 드시고, 싫은 것은 냉장고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사실 우리에게 맞춤형으로 하얀 거짓말을 하시는 걸 알지만 모른척했다.
엄마가 없는 자리. 아버지는 오늘도 텅 빈 마음으로 홀로 감내하고 계시겠지. 저번에 갔을 때 꼬챙이처럼 마르고 기운이 하나도 없으시길래 밥 안 챙겨 드셨냐니까 "안 먹으면 얼른 죽겠지", "아부지 안 드신다고 죽는 거 아니야 고생만 하지. 우리 힘들게 하시려고 그르셔?", "아이다", "그니까 챙겨드셔 건강하게 살다가 엄마 곁에 가셔야지요"
때로는 우울이 정신을 지배하는 날이 있지 않았을까. 오빠는 그날 이후로 더 세심하게 아부지를 보살폈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다.
슬픔은 일상을 지배하고 사람의 감정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옭아매고 마구 헝클어버리는 요물이다.
겨울이다. 엄마가 가신 세월을 견디지 못한 아버지의 고단한 육신은 오늘도 감기로 고생이시다. 약봉지가 나날이 쌓일수록 한숨도 차곡차곡 덮어진다. 아마도 엄마의 잔소리가 늘 그리우시리라.
식구의 생일을 엄마보다도 더 잘 기억하셨는데, 지금은 가물가물 깜빡깜빡하시고, 시간의 처절함을 이겨내고 계신다. 물론 우리도 깜빡깜빡하기에 대수롭지 않다고 설명해 드리지만, 아버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자꾸만 엉뚱한 행동을 하시기도 한다. 집안에다 돈을 여기저기 두시고는 기억을 하지 못한다. 은행에 두라고 해도 왜인지 자꾸만 인출해서 집안 구석구석에 두신다.
어느 날 남동생이 돈을 도둑맞았다는 아버지의 호출을 받고 급히 간 적이 있었다. 도둑이 든 흔적이 없어서 동생은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하고 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어 돈을 찾았다.
왜 이렇게 집에다 두시냐고 동생이 물으니 아버지는 "니 누나들 주려고 그런다.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다 이거라도 주고 싶어서 그러지"라고 하셨단다. 우린 분명히 안 줘도 되니까 아버지 다 쓰시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자꾸만 잊어버리시고 못 준 것에 대한 것만 기억하신다.
마음이 착잡하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고 은행에다 돈을 넣어두고 기록을 하여 늘 보시게 하였다. 얼마나 갈지... 아버지는 우리랑 말을 하거나 통화를 하고 나면 마지막에 한결같이 "고맙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도 고마워 아버지 건강하니까"라고 말하면, 또 "고맙다"라고 하신다.
사람은 참 고단하고 슬프게도 살아간다. 그럼에도 사랑이 삶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잃고 난 후에 오는 슬픔은, 잃기 전에는 그 깊이를 아무도 모른다
#엄마 #아버지 #희생
#김치 #엄마와딸 #슬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