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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생긴 그날의 기억이 또각또각거린다

조금씩 늘려가는 살림살이에 걱정거리가 올라앉았다

by 그리여

유일한 재산이었던 결혼반지를 팔아 시작한 신접살림이 엄마에게는 생활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장사를 시작하고, 리어카에 물건을 실어서 팔고 그렇게 고되게 일하셨다. 변변한 땅이 없으니 농사로 먹고살 수는 없을 터 그래서 선택한 장사였다.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조금씩 장사로 살림의 기틀을 만드셨다.

삶은 힘들고 일상은 부대껴도 순간순간을 성실함으로 무장하고 뚝심으로 살아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 운전면허를 따게 하시고 차를 장만하셨다. 트럭이 집에 도착하던 날 우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차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태우고 시승식을 하셨다.

차 안에 비닐을 뜯지 않고 그대로 둔 의자 위에 앉은 우리는 비닐의 부석거리는 소리조차도 정겨워 신이 나서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큰 부자가 된 듯 기뻤다.


부스럭거리던 그날의 비닐 소리와 새로 산 차에서 나던 냄새가 꽃향기보다 음악보다 감미로웠다.

좌우 회전 시에 또각또각 깜빡깜빡거리던 그 소리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추억으로 기록되었다. 왜 깜빡이를 켜는지 몰랐던 어린아이가, 본인과 남을 위하여 켜는 배려의 깜빡이란 걸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저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좋았던지 아버지가 깜빡이를 언제 켜시나 손만 바라보았더랬다.

지금도 차를 타는 걸 좋아한다. 깜빡이를 켜면 나는 그 소리가 여전히 좋다. 마치 부자가 된 듯 벅차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마련한 트럭에다 물건을 빽빽하게 싣고 다니시던 부모님은 그제야 덜 고된 장사를 하시게 되었다.

차가 생기면서 장사의 신이셨던 엄마는 특기를 발동하여 넉넉하진 않더라도 궁핍하지 않는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트럭이 생기면서 소소한 사고도 생겼지만, 그래도 엄마는 고기를 사서 우리 입에 넣어줄 수 있어서 기뻐하셨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해주는 밑반찬이나 김치는 늘 냉장고에 가득히 찼다. 바쁘신 와중에도 세 아이 키우느라 고생하는 내가 힘들까 봐 부지런히 음식을 해서 주셨다. 서울에는 잘 오시지 않는데 그날은 볼일이 있어서 올라오셨다. 답답하다고 잠시만 머무르시고 새벽 일찍 우리 집을 나섰다.


아파트주차장에 자리 잡은 트럭에는 그동안 우리에게 가져단 준 반찬만큼이나 많은 빈 반찬통이 가득 실렸다.

이상하지! 그 통들을 보는데 그날은 통이 얼마나 하얗게 보이던지. 다시는 못 보지 않을까? 하는 어떤 알 수 없는 막연한 생각이 스치면서 이상하게 불안했더랬다.


그 겨울의 추운 날. 새벽 일찍 부모님은 트럭을 몰고 손을 흔들며 주차장을 빠져나가셨고, 나는 한참을 서서 주차장을 빠져나가실 때까지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을 청소하고 애들 밥을 먹이고 엄마가 준 반찬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넣고 너무 많이 준 사과는 주변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같이 먹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부모님의 차가 미끄러져 교통사고가 났다고 했다. 새벽이라 어슴푸레하게 어두워서 얇게 얼은 도로 위 작은 웅덩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고, 차가 빙글 돌았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충격에 급히 남편에게 전화하고 사고 장소로 달려갔다. 차만 덩그마니 있고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물어서 주변에 물어볼 곳도 없어 동동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엄마가 걸어오고 계셨다.

엄마! 하고 달려가니 엄마는 “나는 괴안타 니 아부지는 병원에 있다”

엄마는 답답하다고 창문을 열고 주무시고 계시다가 튕겨져 나가서 눈이 많이 쌓인 곳에 떨어져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엄마는 그 와중에도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셨고, 병원에서 몰래 나오다가 붙잡혀 들어가기도 하였다. 몸이 아픈 거보다도 장사 쉬는걸 더 못 참아하셨다. 손님에게 신용이 있어야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엄마의 신념이 아픈 몸을 다그치고 있었다. 중고차를 급히 마련하여 또다시 장사를 시작하셨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조금씩 몸이 안 좋아지셨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아서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다.

우리가 아무리 병원을 모시고 가려고 해도 걱정 말라고 했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엄마를 입원시키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가 되었다. 그날의 그 사고로 엄마는 조금씩 몸이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처럼 차가운 새벽에 사고가 일어났고, 이 겨울이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때 좀 더 붙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

추우니까 아침 드시고 가라고 강하게 잡지 못했던 나약함..

바쁘다고, 괜찮다고 해도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시라고 말하지 못했던 어리석음..

지금은 고속도로가 잘 되어 있어서 그 길을 갈 일이 없지만, 어쩌다 가끔 지나가면 사고현장이 어제 일인 거 마냥 떠오르곤 했다.


엄마.. 그립다


새옹지마. 좋은 것이 있으면 안 좋은 것이 따라오는 게 인생이련가

차는 우리에게 큰 재산이었지만, 또 다른 소중한 것을 뺏어가는 요물이기도 했다.


사는 건 어쩌면 발버둥 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처럼, 이유가 있겠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 그저 숨을 쉬니까 사는 것인지도..



#차 #재산증식 #교통사고 #부모님

#감성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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