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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한줄기 빛은 보인다

기둥이 무너진다

by 그리여

남동생은 장사하시는 엄마가 바빠서 엄마와의 시간을 온전히 보낸 적이 없었다. 막내였지만 한 번도 엄마 품에 편안하게 안겨 있는 날이 없었고 태어난 이후로 줄곧 나의 손에 맡겨진 날이 많았다.


마치 엄마가 바쁜 걸 아는 것처럼 어린 아기가 잘 울지도 않고 순하고 참 조용히도 있었다. 포대기에 둘러업으면 애가 아기를 업은지라 불편하였을 텐데도 보채거나 밀치지도 않았고, 내가 그 작은 손을 손안에 품고 있으면 누나의 손길에 편안히 잘도 잤다. 손이 어찌나 조그맣고 보드랍던지 손안에 쏙 들어온다. 그랬기에 엄마는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었나 보다.

나는 친구들이 부르면 놀고 싶어서 나가고 싶었지만 막내를 두고 나갈 수가 없어 종종거리면 막내는 마치 그걸 알기라도 하는 듯 잠이 들었다. 깰까 봐 몇 번을 문틈으로 보고 또 보고 그렇게 잠시 나가서 놀다가 들어오면 그때까지도 자다 깨서 별일 없이 자기 발을 잡고 놀던 순둥이였다.


“구슬아 나도 같이 데리고 가. 같이 놀아”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5살 많은 여동생에게는 한 번도 누나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여동생을 부를 때 이름을 부르니 따라서 이름을 부르는 게 맞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부르는 대로 따라 언니라고 불렀다. 여동생이 막내를 떼어놓고 놀라치면 졸졸 따라오니 여동생은 귀찮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런 남동생을 잘 데리고 놀았다. 때로는 어린애 데리고 노는 게 성가셔서 “설거지하면 데리고 갈게”라고도 하고, 몰래 두고 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막내에게 여동생은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 막내의 손을 잡는데 예전에는 손안에 쏙 들어오던 손이 더 이상 내 손안에 들어오지 않게 되자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아쉬워서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엄마의 빈자리를 한 번도 투덜 되지 않던 과묵한 아이였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아이들을 자라게 했다. 내가 졸업해서 집을 떠나고 둘이 남은 동생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같이 보내면서 누구보다 절친한 남매가 되었다.


막내는 직장을 구하고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부모님 근처로 자원하여 보직을 옮겼다. 그렇게 가까이서 엄마의 약을 지어다 주고 살펴주는 심성 고운 어른으로 자랐다.


늘 웃는 눈동자에는 반짝반짝 샛별이 들어있었다. 말은 잘하지 않는 성격인지라 막내가 막내 같지가 않았다. 엄마가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고 나서 누구보다도 엄마를 잘 돌보아 주었다. 매일 가서 간병을 하는 막내를 보고 사람들은 "엄마가 평소에 얼마나 잘해주었으면 자식들이 하나같이 저렇게 잘할까"하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였다. 주말에 내려가면 엄마는 종이 인형처럼 누워서 남동생의 손길을 받고 계셨다.


“엄마 막내 안 낳았으면 어쩔뻔했어”


엄마에게 속삭이니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말도 못 하고 의식 없이 누워계셔도 가끔은 말이 들리는가 보다. 따뜻한 눈물이 귓불로 흘러내린다.


엄마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며 남동생은 살아오면서 많은 날들 중에 엄마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묵묵히 엄마를 돌보는 동생을 보며 나는 맘이 아렸다. 사는 게 뭐라고 바쁘다고 시간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저렇게 병든 몸으로 누워서야 막내와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가. 말은 못 해도 얼마나 애달파할까 짐작이 간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용광로라도 들어가실 분이란 걸 알기에 지금 당신의 처지가 얼마나 속이 상할까도 짐작이 된다. 만약에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결코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다. 자식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기를 쓰고 사셨는데 얼마나 한이 되겠는가


남동생은 엄마의 손을 잡고 우리가 없을 때 뭐라고 얘기를 주고받았을까. 물론 말수가 없어서 한마디도 안 하고 속으로만 뭔 말이든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감히 물어보지를 못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힘들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평화로워 보였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엄마가 이제는 아기가 되어 막내의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막내는 급성당뇨로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마음이 저렸다. 평화로운 얼굴을 엄마에게 보이기 위하여 애를 썼을 동생의 마음이 보였고, 말하지 못하는 엄마의 안타까움이 들리는 듯하다.


엄마는 우리 집의 기둥이었고 튼튼한 기둥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가 그동안 집안의 기둥으로 우리를 받쳐주었듯이 이제는 우리가 엄마를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된다.

때로는 나쁜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믿으며 그렇게 견디면서 우리는 희망이라는 끈을 잡고 놓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길라잡이 되어주던 엄마는 없었지만, 빛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오랫동안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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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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