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손가락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오빠가 태어나고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시게 되었다. 그 시절의 군생활은 3년을 꼬박 채워야 전역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 엄마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아버지가 없어도 먹고살아야 했기에 자식배를 곪지 않게 하기 위하여 엄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장사를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야채나 과일을 떼어다 팔고 또 어떤 때는 생선을 가져다 팔았다.
사정이 그러니 오빠를 맡길 곳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오빠는 지인들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사촌에게 얼굴을 손톱으로 다 꼬집혀 왔을 때는 속상함에 밤잠을 설치셨다고 했다. 또 어떤 날인가 오빠가 물을 먹지 않고 그냥 엉엉 울기만 하더란다. 어린 아기가 왜 우는지 알 길이 없던 엄마는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오빠를 데리러 가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못 볼걸 보고 말았다고 한다. 물을 먹지 않겠다던 애한테 억지로 물을 먹이고 애는 맵다고 울고 있었다. 달려가 그 물을 뺏어서 먹어보니 매웠다고 한다.
“물에 뭘 넣니껴”
“넣긴 뭘 너어”
자세히 보니 뭔가 하얀 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고 이게 여기 왜 들어있노” 하얀 고추씨였다고 했다. 어린아이에게 그런 걸 먹이다니 엄마는 울면서 오빠를 데리고 도망치듯 나왔다고 한다. 말 못 하는 어린애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싫으면 그냥 안 맡겠다고 하지. 그렇게 오빠는 이 집 저 집 맡겨지면서 받지 않아도 될 학대에 놓이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이 직접 데리고 있는 게 안심이 되어 그 이후로는 업고 다니셨다고 한다.
가끔은 막내 외삼촌이 집에 들러서 돌봐 주시기도 했고, 이웃집 아주머님이 봐주기도 했다. 우리 집에 늘 오시던 용한 비구니 스님이 계셨는데 오빠는 부모랑 같이 살면 단명할 팔자라고 했다. 고심 끝에 엄마는 공부도 시키고 싶어 겸사겸사 믿을 만한 이모에게 맡기기로 하고 서울로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믿을만한 일인가 싶었지만, 오빠랑 같은 이유로 부모랑 떨어져 살아야 했던 사촌은 계속 같이 살아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27살에 요절을 하였고, 엄마는 그렇게 유학을 보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던 큰아버지가 자식을 죽였다고 믿게 되었고, 가슴이 아파도 오빠를 유학 보낸 건 잘했다고 생각하셨다. 자식에게 안 좋다고 하는 건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으셨다.
어린 나이에 서울에서 떨어져 살게 된 오빠는 가족 간의 정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이모가 아무리 잘해준들 엄마와 같겠는가. 고생해도 부모밑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인데 늘 목말라 있지 않았을까. 이모도 시댁 눈치를 봐 가면서 조카를 맡고 있었으니 마음 놓고 챙기지도 못하고 좁은 집에서 애 셋 키우며 살기에도 바빴으니 힘드셨겠지만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생각해 보면 그런 와중에도 잘 보살펴 주신 이모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오빠는 방학에만 잠깐씩 집으로 내려왔다. 손끝이 야무져서 외양간 청소를 깔끔하게 잘하였다. 집에 오면 팔 걷고 너저분한 시골집 청소를 열심히 했다. 부모랑 떨어져 살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을까. 그럼에도 타고난 성품이 활달하고 사람을 좋아하여 친구가 많았다. 성인이 된 후에 아무리 애써도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친한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포부대에서 엄청나게 호된 군생활을 하고 나서 성품이 어둡게 바뀌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현실 앞에 가족들의 등을 떠밀고 홀로 웅크리고 앉아 일어나질 못했다. 그런 오빠 때문에 그동안 고생고생하며 쌓아온 부모님의 성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동생들과 나는 무너지지 않게 힘겹게 기둥을 잡고 부모님 옆에서 도저히 빠져나오질 못할 것 같은 터널처럼 어둡고 지난한 순간을 견뎌야만 했다.
평생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도 만나게 되었고, 가장 가까운 지인을 잃기도 했다. 그런 오빠를 대신하여 송사도 하게 되었다. 증거를 찾고 빈틈을 확인하며 집안일과 일상의 바쁨속에서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못하고 속으로 앓으며 여동생과 나는 준비서면을 작성하고, 외삼촌의 지식을 보태어가며 지루하고 긴 소송을 하고 마침내 승소를 하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오빠는 점점 식구들을 피하며 자신의 굴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피를 나눈 형제. 그 피의 무게는 무거웠고 어깨를 누르고 일어설 힘조차 빼앗길 순간을 애써 버티고 있었다. 우리 또한 아등바등 힘겹게 애 키우며 살던 때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잡은 손을 놓지 못하였고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중심에는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계신 엄마가 계셨기 때문이다. 불안함과 미안함. 죄책감. 무기력. 슬픔이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음을 마음으로 알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이기에 하나가 되어 금 간 곳을 메우고 기둥을 세우니, 삶이. 생활이 조금씩 안정이 되었고 긴장이 풀리신 엄마에게는 건강의 적신호가 밝혀졌다. 살만하면..(뒤는 생략)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조금씩 엄마는 당신의 아픔을 우리에게 감추고 소리 없이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우리가 엄마를 돌보는 과정에서 오빠는 가족 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이런 게 가족이구나!’ 하고 느꼈다고 했다. 힘든 와중에도 우리는 더 단단하게 결속되었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오빠를 보고 가시려 버티고 계셨고, 오빠가 오자 말은 못 하는 상황이었기에 눈만 힘겹게 살짝 뜨고 눈물을 흘리시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빠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어느 날 말했다.
“난 가족의 정이 뭔지 몰랐다. 이제 엄마를 보내고 나니 알 거 같다. 니들이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그 이후로 오빠는 변하였다. 늘 겉돌던 사람이 원래의 밝은 성격을 돌아왔다. 남동생과 둘이 아버지 가까이 살면서 살뜰히 챙겨주어 멀어서 자주 못 가는 여동생과 나는 그나마 한시름을 놓고 있다.
엄마의 가슴에 한으로. 애증으로 남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렇게 돌아가시면서도 아픈 손가락을 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려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는지 오빠에게 가족을 안기고 돌아가셨다.
가족은 늘 곁에 있었지만 오빠는 마음의 눈을 감고 있어서 보지 못하였고, 엄마의 눈을 감기고서야 가족을 향한 애정의 눈을 뜨게 되었다. 엄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옆에 있어도 잘 보이지 않는 것이 가족 간에 표현되지 않은 사랑이다.
말하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는 게 아니다. 가족 간에 표현하지 않아도 붉은 피는 사랑을 더 깊게 만들고 우린 그것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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