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여동생은 엄마와 참 많이도 닮았다. 성격이 밝고 쾌활하며 목청도 크고 장난도 잘 치고 엄마와 판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둘은 잘 투닥거리고 금방 웃고 또 장난치고 엄마가 잠시나마 크게 웃는 걸 보면 동생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말 안 듣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모녀의 모습은 보기에도 좋았다.
엄마 친구 중에 딸이 없어서 아쉽다는 분이 계셨다. 어렸을 때 동생은 똘망하니 밤톨 같았다.
“구슬이 나 주면 안 되나”
“안된대이” 그랬다가 동생이 말 안 들으면 “델꼬 가”
두 분이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농담을 하는 걸 들은 동생은 소리쳤다.
“내가 물건이가 안가”
하고 골이 잔뜩 나서 씩씩거리면 엄마는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군다고 싸리 빗자루를 드셨고, 동생은 줄행랑을 치다가 붙잡힌다. 그러곤 이내 또 깔깔 웃는다.
“가마이 있어라 머리 빗는데 나대면 잘 못 묶는대이”
그러면서 참빗으로 곱게 빗어서 짱베이로 끌어오려 한 묶음으로 묶었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사진 속의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쩌면 그 시절의 엄마와 동생은 최고의 시간을 같이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밤이 깊었는데 엄마와 아빠가 그 밤에 외출을 하셨다. 여동생은 밤에 잠이 없는 부엉이였다. 뭐하는지 밤에 늦게까지 잘 안 잤다. 그러다가 부모님의 외출이 궁금하였는지 오실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이윽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두 분이 들어오셨다. 뭔가 부스럭거리기도 하고 허밍도 들리고 왠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동생은 문틈으로 살짝 엿보았다. 엄마와 아빠가 손을 잡고 당기고 밀고 돌리고 춤을 추고 계셨다고 한다. 처음 보는 모습에 동생은 눈이 동그래졌다.
치맛자락이 하늘하늘 날리는 것을 보니 괜히 뭔가 알 수 없는 마음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부모님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몸은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이 아름다웠다. 눈이 떼지 않고 보던 동생은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그냥 행복했다나
나중에 들어보니 부모님과 절친이신 분들이 같이 고된 일상을 잠시나마 잊고자 춤을 추시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 시절에 춤이 한창 인기가 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선이 곱지 않은 시절이었기에 일 끝나고 몰래 모여서 추신 모양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고단하고 퍽퍽한 삶을 이기고 살 수 있었대이”
힘들고 고단했던 생활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춤을 추신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나풀나풀 날리는 치맛자락에 근심을 날려버리고 잠시나마 즐거운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런 시간이라도 갖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해 보면 나라면 그렇게 힘든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시간이 많았다. 부모님의 삶을 지켜보며 당신들이 느꼈을 그 무게를 공감하며 다시는 없을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나는 보지 못한 부엉이 여동생이 전해 준 이야기에 나는 엄마가 재미없이 일만 하고 갔을까 봐 속상했는데 그나마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에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힘든 시간을 견디는 각자의 방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힘든 순간을 지혜롭게 넘길 수가 있는 것이다. 때로는 냉혹한 현실에 마음이 아파도 견뎌야 했고, 아픔이 가슴을 짓눌러도 '악'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홀로 감내해야만 했던 그 순간, 그 시간들 앞에 무엇이든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상황에서 한줄기 빛 같던 즐거움이 있었다면 즐겨야 한다. 인생은 항상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래도 가끔은 내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있었을 그 옛날.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였던 엄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숨죽이고 살았을까. 그 속에서 숨통을 틔워줄 일을 찾아서 했다는 것에 안심이 되어 나풀나풀 치맛자락 날리고 밝은 얼굴로 원을 그리며 어두운 밤을 하얗게 지새우시던 젊은 엄마의 얼굴을 조용히 떠올려본다.
일상이 힘들어도 동반자와 같이 나눌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건 어두운 골목길에 서 있는 가로등처럼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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