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문풍지가 막아주던 추위
집안일은 아버지보다도 내가 더 많이 엄마와 보조를 맞춰서 뭐든지 척척 같이 잘 해냈다. 그 시절에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 확실한 구분이 있었다. 아무리 같이 돈을 벌고 고단하게 일해도 집안의 온갖 일은 여자의 몫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엄마의 보조 역할을 잘했다.
요즘은 겨울이 와도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이 많지는 않다. 그저 겨울옷을 꺼내놓고 이불을 바꾸는 정도. 하지만 옛날에는 겨울맞이를 위하여 이것저것 해야 할 것이 많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항상 문창살에 구멍이 많이 난 문종이를 뜯어내고 새로 문종이를 붙인다. 밀가루풀을 걸쭉하게 쑤어서 내가 붓에 풀을 묻혀서 문종이에 바르면 엄마는 문에다가 척하고 붙이시고 싸리빗자루로 쓱 하고 쓸어내렸다. 그러면 풀 먹은 새하얀 문종이가 눅눅하게 있다가 마르면서 빳빳해진다. 종이가 약해서 살살 잘 붙여야만 한다. 창살에 하얗게 붙은 한지를 보면 어떠한 바람도 절대 통과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깨끗한 종이가 빳빳해지는 걸 보고 있다 보면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창살이 무늬처럼 여기저기 희끗희끗 보인다.
꼼꼼하게 풀을 바른 문종이를 또 한 장 들고 천장에 대고 싸리 빗자루로 쓱쓱 쓸면 벽지가 착하고 붙는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시원스럽게 잘하셨다. 그 옆에서 나는 엄마의 조력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음은 가마솥에 메주콩을 한가득 넣고 푹 끓인다. 나는 불 조절을 해가면서 정성껏 불을 지핀다. 콩 익는 냄새가 구수하게 나면 왠지 나른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생긴다. 행복한 냄새인가 보다. 콩을 으깨서 면포에 싸서 틀에 끼우면 나는 발로 꾹꾹 밟았다. 네모난 메주를 꺼내서 짚으로 묶어서 방 한쪽 구석 천장에 마련된 걸이에 줄줄이 걸어둔다. 겨우내 메주가 숙성되는 방에는 쿰쿰한 냄새로 가득 찬다. 그렇게 만든 메주로 간장을 만들고 된장을 만들고 엄마는 기가 막히게 맛있는 된장찌개를 끓이신다. 그리고 서울에 계신 이모에게도 메주를 보내주신다. 이모는 엄마가 만든 메주가 최고라고 하셨다.
우리가 집안일에 정신이 없을 때 아부지는 땔깜을 창고에 가득 채워두신다. 짚. 쌀딩기. 쪼갠 나무. 불을 땔 수 있는 것으로 가득 찬다. 이로써 어느 정도 겨울 준비가 끝이 난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부산하게 움직여 집안일을 하면 피곤하여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따뜻한 집안은 쉽게 데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준비하여야만 긴 겨울을 덜 춥게 보낼 수가 있는 시절이었다. 머리맡에 둔 걸레가 꽁꽁 얼도록 추웠던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한 아랫목과 잘 바른 문풍지로 닫아놓은 방문으로 더운 공기를 지켰고, 위풍으로 코가 얼어도 훈훈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던 이유는 엄마와 아부지의 노고가 집안 곳곳에 배어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날조차도 그리움으로 남을지를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하였다.
엄마와 나는 언제나 집안일을 같이 하는 동지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런가 엄마는 내내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엄마와의 추억에는 같이 일을 하던 순간이 많았다. 엄마는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고 부지런했고 그 옆에는 내가 항상 같이 했다. 엄마가 장사하느라 바쁘시면 나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랬기에 자라면서 어쩌면 모녀이면서도 같이 힘든 시절을 보낸 동지와도 같은 마음이 생겨났으리라. 엄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장녀로서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있었고 어느 한순간도 엄마가 없는 삶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방에 누워 있으면 낮에 하얗게 바른 벽지의 촌스러운 꽃무늬가 눈에 들어온다. 힘든 일을 마치고 잠이 들면 그날은 어김없이 가위에 눌리고 울면서 깼다. 꿈에 천장의 벽지에 그려진 꽃무늬가 우르르 밑으로 쏟아진다. 손으로 막으려 하지만 무게가 느껴져 숨이 막힌다 몸이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면 엄마가 자다가 놀라서 깨시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에휴.. 쯧쯧..” 꿈결에 들은 듯 쓸쓸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잠을 깨우면 꽃무늬는 허공에 흩어지고 이내 잠으로 또 빠져든다. 그 꿈이 너무나 선명하여 나는 작은 꽃무늬가 있는 것은 뭐든지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꽃무늬로 디자인된 화려한 옷이나 벽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그 꿈은 아직도 선명하게 잊히지 않는다.
엄마와 했던 그 많은 일들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더러는 잊고, 더러는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어서 어떤 특정한 장소나 냄새, 풍경, 소리만 들어도 불쑥 드러나서 그 옛날의 어린 나와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다.
은은하게 혹은 강하게 맡았던 냄새는 저장고에 쟁여둔 기억을 들춰내고 그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후각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후각이 예민한 나는 특정한 냄새를 맡으면 배가 아프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음식은 혀끝으로 맛을 보는 게 아니라 냄새를 맡아야만 맛이 느껴진다. 마치 추억의 한 자락을 먹듯이 그리운 냄새를 찾게 되고, 그리운 향은 잊혔던 그 어떤 장면을 떠올려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놓는다.
꽃이 아무리 예뻐도 무더기로 쏟아지는 건 무겁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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