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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어딜 가시는 걸까

엉뚱한 상상

by 그리여

티브이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집에도 흑백티브이를 들여놓으셨다. 늘 남의 집에 가서 밤이 늦도록 티브이를 보고 오는 여동생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집은 인심이 좋았었던 것 같다.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 집이었는데 동생은 불 꺼진 그 집의 거실에서 혼자 오도카니 앉아서 밤늦도록 티브이를 보고 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으니 늦어도 가라고 보채지도 않으셨다.


엄마는 그것이 미안하여 네 개의 다리가 있고 문을 여닫는 흑백티브이를 들여놓으신 것이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과 문을 열고 전원을 누르면 그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흑백의 영상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하다.


한창 인기 있었던 것이 수사반장과 전설의 고향, 외화로는 주말의 명화와 맥가이버였던 걸로 기억한다. 엄마는 이상하리 만치 외화는 못 보게 하셨다.


“우리말도 아니고 쏠라쏠라 하는 걸 뭐 하러 보노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소리가 듣기 싫타”


그럼에도 호기심에 몰래 봤다. 너무 재미있어서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 맥가이버였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척척 만들어내고 문제를 해결해 간다. 그의 놀라운 창의성과 설명하면서 독백처럼 대사를 하면서 무엇이든 뚝딱 만드는 게 신기해서 도저히 안 보고는 못 배기게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나무궤짝을 떼어서 이것저것 못으로 박아서 만드는 걸 좋아했다. 썰매도 만들고 책꽂이도 만들고 못으로 탕탕 박는 망치질이 재미있었다.


아무튼 흑백 티브이는 혁명과도 같게 생활 전반에 깊이 자리 잡았다. 전설의 고향은 무서워서 오빠는 시그널 소리만 나도 귀를 막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못 보면서도 궁금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안 바뀌었나 구미호 갔나 무섭게 둔갑했나 빨간 눈으로 누구 홀리나”


그 와중에도 구미호 눈이 빨간 걸 알고 있네. 흘낏 훔쳐보기는 했나 보다. 난 겁이 없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해서 보느라 오빠가 쏟아내는 질문에 대꾸할 생각도 못했다.


“뭐가 무섭노 얼굴에 다 그려 놓고 변장한 건데 궁금하면 봐 재미있어”


그 여파가 이상한 곳에서 발현되었다. 밤마다 엄마가 어디론가 자꾸만 나가신다. 난 구미호가 엄마를 잡아먹고 엄마로 둔갑한 건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어디를 저렇게 가시지 호기심에 몰래 훔쳐보았지만 금방 휑하니 나가시니까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왠지 일어나면 안 될 거 같은 이상한 상상에 사로잡혀 드라마를 떠올린다.


엄마는 초저녁에 일찍 주무시고 자다가 일어나 꼭 한 번씩은 ‘아이고 귀찮아’ 하고 일어나셔서 나가셨다. 수돗가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뒤를 보시면 티브이에서 봤던 구미호가 생각나서 얼른 눈을 감았다. ‘그럴 리가 없어 구미호가 어딨노’ 하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구미호가 아닌 걸 확인하기도 해야 했고, 어디를 가시는지 너무 궁금하기도 했기에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다.


“엄마 자다가 맨날 어디 가노”

“어디 가기는 오줌 누러 가지”


그랬다 소변이 마려워 자다가 일어나 가신 거였다.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동네에 있는 공동 화장실이 있었는데 거기를 가시는 거였다.


얼마나 불편했을까

집안에 화장실이 있어도 자다가 일어나서 가려면 얼마나 힘든데, 그 밤에 밖으로 나가야 했으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엄마를 닮아서 그런가 나도 자다가 꼭 화장실을 간다. 화장실이 방 옆에 있는데도 일어나서 가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아이고 귀찮아”


나도 모르게 그 옛날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화장실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것이 집안에 없다니 일상조차도 힘겨웠던 엄마의 삶을 한 번 더 느끼게 되었다.

나는 방 옆에 있어도 이렇게나 힘이 든데 엄마는 그 밤에 밖으로 나가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도 그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밤에는 요강을 사용하여 불편함을 몰랐다.


미루어 짐작했던 거보다 훨씬 불편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고단한 몸을 자다가 일으키는 게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내가 겪어보니 알겠다.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삶은 또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되풀이되었다. 유전자만 남는다고 한다더니 나도 엄마의 유전자를 갖고 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똑같은 행동을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유전자는 환경에 맞게 변이하고 발전하는 거니까

엄마는 "죽으면 다 편하다. 살았을 때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욕심 없이 가면 된다"라는 말씀을 혼잣말처럼 하셨다. 얼마나 힘들면 그랬을까 육체의 고단함이 정신을 지배하는 순간이 있기에 이제는 그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항상 치열하고 열심히 사신 엄마를 보면서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닮아가고 있었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삶의 기억은 원하던 원치 않았던 엄마와 딸에게로 기어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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