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가 같았던 소리
엄마는 없는 살림에 보탬을 얹고자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이셨다. 장사를 하고 집에 오시면 쉬지도 못하고 홀치기라는 부업을 하셨다. 일본 옷감을 나염 하기 전에 무늬를 하얀 천에다가 규칙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검은 점으로 빽빽하게 찍어 놓은걸 기역자 모양의 홀치기 틀에 앉아서 고리에 옷감의 점을 걸고 실로 꼭 묶어주는데 그걸 ‘홀치기’라고 했다.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시절 동네 아낙들의 부업이었다. 엄마가 바빠서 못하고 기일이 촉박해지면 나는 엄마가 없는 틈에 그걸 도와서 해 놓았다. 얼마나 점이 빽빽한지 또 천은 얼마나 긴지 해도 해도 줄지 않는 듯했고 보기만 해도 지루한 작업이었지만, 엄마를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참 열심히도 했던 거 같다. 눈으로 보고 어깨너머로 배운 건 뭐든 바로 따라 했기에 어렵진 않았다.
밤에 흐릿하고 칙칙한 불 밑에서 엄마가 홀치기틀 쇠로 된 고리에 천을 걸고, 나무로 만든 장구모양으로 생긴 작은 도구에 실을 감은 북으로 홀킨다. 실이 감겨 있어서 살짝 파스텔 색깔 같은 아스라하고 둔탁한 소리가 나면서도 일정하게 퉁퉁거리면 왠지 안심이 되고 잠이 왔다.
퉁퉁 툭툭 둥둥... 홀치기는 숙련도에 따라 빠르게 하면 일정하고 고운 소리가 나서 음악인 듯 듣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마력이 있다.
그 소리를 듣다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가끔은 그 소리가 그리워 자판기를 두드린다. 왠지 모르게 그 소리와 닮아 있다. 도도독 다닥다닥 딕딕....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일렁인다.
엄마는 대체 언제 자는 걸까. 엄마의 고단함을 말아놓은 것 같은 홀치기 천 덩어리가 유난히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엄마가 옆에 있어 안심이 되는 소리였다. 밤이 깊어가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면 까무룩 잠든 나는 업어가도 몰랐다.
“일어나라 야들아 학교 안 가나”
오늘도 엄마는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를 깨우셨다.
“솥에 물 끼리 났다 쎄기쎄기 씨라”
나는 세수를 하고 엄마가 밥을 안치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풍로를 돌리니 빨갛게 꽃송이가 피어난다.
쌀딩기(쌀껍질)를 던져 놓으면 복사꽃처럼 곱게 피어난다. 바람은 세지도 않고 약하지도 않게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딩기는 가벼워서 금방 구멍이 푹 뚫리지만 조절만 잘하면 황홀한 빛깔로 눈처럼 소복이 쌓이며 불이 인다. 그래서 바람이 세면 안된다. 가벼워서 재도 많이 날렸다. 난 언제나 신데렐라(재투성이)가 되어 학교를 갔다. 달려가다 보면 재는 어느새 털어지고 날려가고 은은하게 냄새만이 남았다.
엄마는 부지런히 우리 밥을 차려주시고 일하러 나가셨다. 장사를 하셨기에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학교 갔다 오면 동생들 보살피고 공부도 가르치고 엄마가 올 때까지 집안일을 하면서 기다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축도 키우고 가마솥에 밥을 해두고 엄마를 기다리다 보면 해가 지고 “야들아 뭐하노!” 하고 엄마가 활기차게 들어오셔서 후다닥 반찬을 한 가지 하고 밥을 차려 주셨다. 늘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엄마는 양가 집안에서 한 푼의 지원도 없이 숟가락 한 세트 들고 신접을 차리셨다고 했다. 작은 외삼촌은 엄마가 장녀로서 희생하고 집안 살림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임에도 고생하게 했다고 외조모. 외조부와 큰외삼촌을 원망하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고생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린 눈에도 그런 엄마가 보였다. 언제나 강인하고 활기차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보였다. 나는 학교에서 상을 주는 것이 있으면 뭐든 열심히 해서 받아왔다. 밝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러면 엄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니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는 아들만 귀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으셨다. 아들 중에서도 장남을 특히 귀하기 여기던 외갓집은 엄마를 더 힘들게 했다. 외할아버지는 꼿꼿한 선비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자식들은 끔찍하게 잘 챙겨주셨는데 이상하게 딸에게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단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데 외할머니는 미안함도 없이 엄마에게 일만 시키셔서 그게 그렇게 싫어서 당신은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는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속이 많이 상하다고 하셨고 늘 내게 미안한 마음을 품으시고 사셨다.
시간이 흘러도 관습은 변하지 않았고 결국은 엄마도 그런 걸 보고 자라셨기에 아들에게 집중하시는 분으로 사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어느 집이든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펴고 동생들을 그 길로 이끌어 따라오며 잘 된다는 믿음이 확고한 시절이었다.
돈이 없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하는 현실에 가슴 아파하셨다. 시시때때로 큰집에서 없는 돈을 긁어서라도 가져갔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시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지라 현실은 참으로 팍팍했다. 그럼에도 딸들에게도 다 시켜주시려 하셨지만, 나는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기에 받을 수가 없어서 독립을 하고 앞가림을 했다. 나는 참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해도 한 번도 불평불만을 해 본 적이 없다. 그저 현실에 순응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그저 부모님이 계신 것이 좋았고, 고생하시는 엄마를 보면 항상 기쁘게 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애늙은이었다.
어려움이 많으면 아이는 빨리 자라나 보다. 고생을 하다 보니 마음은 몸보다 훨씬 훌쩍 자라 버렸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보니 어느 자식 하나 귀하지 않은 자식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엄마의 아픔이 더 가슴깊이 전해져 왔다.
나는 왜 갑자기 홀치기가 생각났을까. 홀치기를 하며 가볍게 한숨을 쉬는 엄마를 보며 난 오빠의 얼굴을 그려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면 엄마는 "어메야 똑같대이"하시고 등불보다 환하고 밝게 웃으셨다.
걱정과 그리움으로 한숨지으며 홀치기를 하던 엄마는 바람이 불어 문이 덜컹거리면 내다보고 실망하며 다시 들어오고 방학을 하면 언제나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이셨다.
하루가 여삼추(如三秋)라고 서울로 보낸 오빠를 기다리며 그 모진 시간을 견뎠다.
기다림은 말로 하지 않아도 옅은 한숨을 쉬고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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