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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의 봄날은 언제였던가

엄마의 숨결이 머물던 자리

by 그리여

마음에서 요동치던 타임머신. 작았지만 포근했고, 힘든 가운데서도 재미를 찾았고, 부족하고 불안정한 일상도 무던하게 넘기던 그 시절. 나의 의식을 일깨워 엉성하고 낡은 문이 삐그덕 열리는 그 작은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엄마는 영특한 두뇌와 강인한 성향에도 인정이 많았고 예쁘게 꾸미는 것과 꽃을 좋아하고 장난을 좋아하시는 소녀 같은 여린 면도 있으신 여장부셨지만 그 모든 걸 나타내지 않고 포기하셨다.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엄마라는 옷을 입으시고 무채색으로 씩씩하게 살았다. 무채색의 칙칙한 일상에서도 항상 호탕하고 밝게 잘 웃으셨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도 엄마는 굴하지 않고 집안을 일구셨고, 거지가 길거리를 활보하던 그 시절에도 우린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화장실도 없는 작은집에 살면서도 엄마만 있으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때로는 부러지지 않는 대쪽 같은 성향이 있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결국에는 헤쳐나가셨고, 그 작은집에 엄마보다 더 어려운 부부에게 작은방을 하나 만들어서 세 들어 살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살뜰히 챙겨드리시는 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 아주머니는 부지런히 일하여 살림이 펴서 나가실 때까지 엄마의 따뜻함에 언니처럼 잘 따르셨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가슴을 쥐어뜯으며 형님형님 하고 목놓아 제일 많이 우셨다.


엄마는 그런 분이었다. “없이 살아도 남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 덕을 쌓아야 한다. 손해 보듯이 살아야 한다”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나는 그 가르침이 가스라이팅처럼 남아있어서 그런가 악착같이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손해 보는 듯해도 굳이 싸우지 않고 받아들였으며 억울한 일이 있어도 나보다 어른이면 대꾸도 하지 못하는 그런 아이로 커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나의 영웅이었고 우주였고 보호자였다. 가끔은 나와는 다른 생각을 말씀하셔도 기꺼이 따르는 충성심을 보이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온다고 말씀하시고 항상 반듯하게 사셨다. 그랬기에 우리는 엄마가 쌓은 공덕으로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리라


부모님의 부지런함은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장사를 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새벽 일찍 장을 펴셨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움직이는 건 기본이었고, 무싯날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가끔 저녁에 동네 마실을 나가시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어느 날 나는 물어보았다.

“피곤해서 눈이 감기는데 왜 안 자고 마실 나가노”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알려면 나가야지 피곤해도 어울려야 한대이”


엄마는 어떤 일이든 허투루 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의지도 확고하고 확신에 찬 일들은 주저 없이 끌고 나가는 뚝심이 있으셨다. 그래서 그런가 엄마가 하는 말은 뭐든지 옳다고 생각하고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지 엄마가 허락하지 않으면 망설이는 마마걸이 되었다.

물론 그 바닥에는 엄마의 성실함과 추진력과 활달함과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집안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에 대한 강한 존경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막 장사를 시작한 젊은 부부는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힘들어서 쉴까. 비가 오면 장을 열지 말까. 하다가도 부모님을 보면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고 했다. 부모님이 롤모델이라면서 자기들도 열심히 해서 자리를 잡겠다고 하는 그들을 보면서 뿌듯하고 가슴이 벅찼다.


엄마가 보이지 않게 된 장터에는 사람들이 엄마의 빈자리는 크다고 입을 모았고 허전함에 마음 아파했다. 농협 직원은 엄마가 어디 가셔서 안 오냐고 몇 번을 물어보기에 곧 오신다고만 했다.


따라가는 장사가 아니라 앞서가는 장사를 하셨기에 남들보다 앞선 아이디어로 장사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다고나 할까. 아무튼 엄마가 없는 그 자리에 엄마를 찾아왔다가 헛걸음질 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말했다.


“니 엄마가 만든 엿질금이 최고대이”

“이 집에 오면 물건이 최고였는데 이제 어데 가서 사노”


그 이후로도 한동안 사람들은 엄마를 찾으시고 퇴원하기만을 학수고대하셨다.


어느 해던가 내가 일하면서 세 아이들 키우며 익힌 것을 kbs뉴스 정보를 전하는 코너에 나오게 되었다. 엄마는 뉴스 하는 시간에 티브이를 켜고 상인들과 같이 보면서 사람들에게 딸과 손녀를 신바람 나게 자랑하셨고, 알아보시는 분들 때문에 난 쑥스러워서 한동안 장터에 가지 않았다. 또 언제 안 나오냐고 내심 기대하셨지만 그 이후로 다른 방송사에서 계속된 섭외전화가 왔지만 나는 거절하였다. 한 번이면 족하다 생각했고 엄마는 아쉬워했다. 야속한 시간은 그럼에도 무정하게 흐르고, 생기 넘치던 그 장터에 엄마는 없었다.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대던 그 시골의 장터에 엄마의 숨결만이 흔적으로 남아있고, 그 어디에도 없는 엄마를 찾으려 빈 마음으로 내내 서 있었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마음은 부질없이 장터에 남겨지고, 그 자리에 말없이 삶을 일군 엄마의 흔적이 있었고, 없는 것 속에서도 다 주고 가신 엄마는 짧은 봄처럼 아스라이 사라지셨다.


시간도 막지 못한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시나브로 가슴에 구멍을 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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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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