꽐꽐 시원하게 솟구치는 물줄기
부엌 앞에는 작은 수도가 하나 있었다. 양동이에 물을 받아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요긴하게 쓴다. 쌀을 씻은 쌀뜨물에 잔반을 넣어서 돼지에게 끓여주면 와그작 쩝쩝 맛나게도 먹는다.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아서 새벽부터 수도를 녹이느라 난리 법석이다. 햇볕이 들지 않던 집의 구조 특성상 부엌 앞이 제일 추웠고 아무리 감싸도 수도는 얼어붙었다.
까맣게 그을리도록 불을 드리대도 잘 녹지 않아 받아둔 물을 데워서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계속 드리 부으면 그제야 피직 하고 언 수도가 녹는 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끽끽 수도꼭지를 틀으면 물이 조금씩 쫄쫄 흐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겨울에는 물을 마음 놓고 쓰지 못했다.
큰집에 가면 우물이 있어 두레박으로 시원한 물을 길어 올려서 펑펑 쓰고, 외갓집에 가면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부어서 긴 쇠 손잡이를 아래위로 열심히 들었다 놨다 펌프질을 하면 손이 묵직해지는 게 느껴질 때 힘을 더 주면 시원한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그러면 금세 물독이 차서 상쾌한 물을 마음 놓고 쓴다.
하지만 장터인 우리 집은 마당이 없고 조그마한 수도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물을 마음 놓고 쓰는 것에조차도 왠지 모를 빈익빈부익부가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그래도 괜찮다 수도는 있으니까
비가 오면 처마밑에 커다란 다라이를 두고 빗물을 받아 여름이면 햇볕에 데워지기를 기다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였다. 빨래는 집에서 할 수 없었다. 물이 쫄쫄 나오니 답답해서 하기 불편하기에 동네 시냇가로 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하러 나오는 빨래터가 있는데 납작한 돌을 차지하려면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은 피해야 한다. 여름에는 빨래를 하려고 들어가면 거머리가 발에 붙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겨울에는 얼름을 깨고 그 사이로 빨래를 넣어서 해야 하는데 차가워서 빨래가 잘되지 않고 비누도 거품이 잘 일지 않으니 때가 잘 나가지가 않는다. 작은 손으로 비비려니 손은 시리고 힘은 없으니 방망이로 탁탁 두드린다. 그러면 방망이가 닿는 부분의 때가 '아이고 아파라' 하듯이 납작하고 허옇게 바닥에 가라앉는 듯이 보인다. 어찌 되었든 방망이로 때를 두드리고 헹구면 그냥 손으로 비비는 것보다 더 깨끗하다. 빨래도 맞아야 하는구나. 피식 혼자 웃곤 했다.
찬바람에 빨래는 돌에 붙어서 꽁꽁 얼었고, 달라붙은 옷을 떼어서 대야에 담고, 대야를 머리에 올려서 뒤뚱뒤뚱거리고 집에 와서 가게 앞에다 줄을 매고 걸어놓으면 빨래가 딱딱한 돌덩이 같고 말라붙은 문종이처럼 뻣뻣해진다
해도 잘 들지 않는 가게 앞이라 빨래 한번 말리려면 며칠이 걸렸다.
그렇게 물을 마음 놓고 쓰지도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는 동네 인부들과 가게 앞에 기계를 설치하고 물길을 찾고자 파기 시작하였다. 커다란 기계가 쉴 새 없이 동작하고 기억에 희미하지만 뭔가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파고 하는 작업을 거쳤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물이 나온다고 인부가 소리쳤다.
성공이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는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하수가 생겼다. 양수기 펌프를 연결하여 물을 끌어올리고 수도를 연결하자 물이 콸콸 나왔다.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그런 과정을 거쳤다는 것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좋은 물을 잘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물이 맛있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무엇보다 겨울에 빨래를 할 때 물을 쓰기가 수월해서 그 추운 겨울을 나기가 조금은 편안해졌더랬다. 물이 매끄러워 손을 씻으면 부드러운 게 느껴졌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던 그 지하수가 가끔 생각난다. 아파트는 겨울에는 물이 차갑고 여름에는 따뜻하다. 특히 여름에 뜨거운 물이 잠시 나오면 더욱 그 지하수가 생각나고, 겨울에는 손이 시리도록 차가운 물에 깜짝 놀라면서 또 그 지하수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물은 잘 나오지만 그 옛날 그 지하수가 생각나게 만든다. 그 당시 새벽 일찍부터 땅을 파던 기계가 왠지 활기차게 느껴지고 희망에 들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생명이 움트는 강인함이 연상되었다. 바닥을 보며 물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열심히 일하시던 아버지와 인부들! 그리고 그 곁에서 지켜보던 나!
이 모든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조각조각 펼쳐진다.
왜인지 모를 울컥함이 생기고, 흑백 연필스케치의 빛바랜 그림처럼 희미하게 잊혔던 기억 속에 활짝 웃던 엄마가 보였다.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뿌연 안갯속에 숨긴 그 어떤 것. 탁한 색깔로 칠해서 저 밑 뇌리 속에 본능적으로 숨겼던 아픔이 자리 잡은 듯이 아려온다.
물이 주는 풍족함에, 또 부족한 게 많았던 그 시절에, 난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모르게 가끔 이렇게 생각나는 단편의 기억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중년의 고단함. 육체의 아픔에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널뛰는 날에는 솟구치는 물줄기를 떠올리게 되고 잠시나마 가슴이 탁 트이는 착각 속으로 빠져든다.
물은 생명을 키워주고 우리는 그 물에서 사랑을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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