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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mme Jan 10. 2023

로또 여행기

At the edge of the world

로또 여행이라니. 무슨 말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로또(Rotto)는 지구상에서 쿼카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인 로트네스트 아일랜드(Rottnest Island)의 별칭이다. 일이 없는 날에는 집에 콕 틀어박혀 뭔가를 깨작이다가 늘어지고 마는 생활이 반복되면서 스스로에게 '이럴 거면 왜 워킹 '홀리데이'를 왔는가'라고 질문했다. 일하고 돌아와서 뻗어버리는 생활만 반복되면 그게 외노자지 워홀러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즈음 시드니에서 워홀을 하고 있는 친구의 '너 쿼카는 봤어?'라는 말에 바로 로트네스트 아일랜드 여행을 계획했다. 


퍼스 시티에서 출발하는 페리와 프리맨틀에서 출발하는 페리가 있는데, 더 저렴한 프리맨틀 발 페리를 예약했다. 자전거는 현장 대여가 가능하다는 말을 믿고 예약하지 않았다가 섬에 도착해서 후회했다. 두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지금은 여름이고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그저 외지 관광객들만 놀러 오는 날이 아니라 현지인들도 가족들, 친구들과 스노클링 등의 액티비티를 즐기러 오는 날이었다. 현장 대여 가능한 자전거가 모두 매진되었고 직원들은 버스 타는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달리고 싶을 때 달리는 여행을 원했기 때문에 무작정 기다렸다. 섬에 도착한 시각은 10시였지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섬을 둘러보기 시작한 시각은 11시 반이었다. 좀 더 여유롭게 즐기고 싶은 마음에 돌아가는 페리를 늦췄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보는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는 황량했다. 뙤약볕, 모래, 그리고 건조한 기후에 적응한 식물들이 만드는 단조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끝없이 이어졌고 강한 역풍이 불었다. 더욱 힘을 실어 페달을 밟았다. 


한참 달리던 나를 멈추게 만든 것은 쿼카였다. 이 녀석은 토실토실하고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무서움을 모르는 순진한 아이처럼 사람에게 가까이 왔다가도 무심하게 돌아서기도 했다. 쿼카를 만지는 것은 불법인데 이 녀석은 귀여운 얼굴을 무기로 내 선글라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도발했다. 섬을 모두 돌아보고 난 뒤 선착장 근처의 상점가에 갔을 때는 먹을 것이 많아서인지 훨씬 쉽게 쿼카를 볼 수 있었지만 건빵 속의 별사탕처럼 쿼카를 찾아내는 놀라움과 기쁨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출발할 때는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 황량한 풍경 속에 혼자 달리고 있었다. 로드 트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 어쨌든 길 위를 달려가는 것. 목적지보다 길 위를 달리고 멈추는 모든 순간에 의미를 둔 로드 트립은 인생과도 닮았다. 


마리 코브(Mary Cove) - 숨은 진주 같은 곳이다.


어떤 순간에는 나와 반대편으로 가는 사람들만 보였다. 앞을 봐도, 뒤를 돌아봐도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가 싶었지만 저들도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먼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일 터였다. 어느새 웨스트엔드(West End), 섬의 서쪽 끝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섬의 끝자락에 가까워질수록 강한 해풍이 불었다. 마침내 육지의 끝에 도달했을 때, 나는 The edge of the world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도양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마주한 웨스트엔드. 이 너머의 육지는 너무나 아득히 떨어져 있다. 이곳의 바다는 로트네스트 아일랜드의 다른 해변들과는 사뭇 달랐다.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이었다. 맹렬한 기세로 밀려온 파도는 절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암벽도 파도의 기세를 막지 못하고 틈 사이로 바닷물을 왈칵왈칵 토하기도 했다. 바위를 깎는 바람과 파도의 위력을 실감했다. 망망대해 앞에서 한참을 서있다가 문득 <노인과 바다>가 떠올랐다. 노인은 매일 바다로 나가기 전, 어떤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봤을까?



서쪽 끝을 향해 갈 때 그렇게나 나를 밀어냈던 역풍은 돌아오는 길에서는 순풍이 되었다. 역풍에 맞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순풍의 도움으로 편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힘겹게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도, 내리막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도 모두 나름의 즐거움과 가치가 있는 순간들이었다. 


선착장 근처로 돌아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육지로 돌아가는 페리에 몸을 싣었다. 로트네스트 아일랜드가 멀어졌다. 저무는 해는 강렬한 조명이 되어 로트네스트 아일랜드를 비췄고 섬은 이내 실루엣만 남기고 모습을 감추었다. 5시간 넘게 뙤약볕 아래서 자전거를 타서인지 바닷 물결에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박노해 시인의 <동그란 길로 가다>에서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낯선 섬의 비탈진 길을 오르내리며 땅끝까지 갔다가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고, 떠나는 배에서 오늘의 여행을 돌아보는 것. 로또 여행은 내게 삶을 꾹꾹 압축해서 보여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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