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소진되고 난 후에 자각한 것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다. 워홀 생활을 하면서 이리저리 생각나는 글감은 많아서 벌려놓기는 많이 벌려놨는데, 도무지 글을 전개하고 마무리할 수 없었다. 처음 이것을 자각했을 때는 '내가 매일 몸 쓰는 일만 하고 머리를 안 써서 머리가 안 굴러가나 보다' 정도로 생각했다.
카페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내게 완전히 지친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피곤하기는 했으나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라고 대답했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를 쓰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3일 밀린 것으로도 충격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곤 했는데 일주일째 밀린 일기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미 내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잊어버렸기에. 기억이 난다고 해도 그때의 감각은 이미 휘발되고 없었다. 워홀 떠나기 전, 다른 건 몰라도 하루에 딱 A5 용지 반 정도의 일기를 쓰기로 결심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매일 비슷비슷한 일을 하면서 살아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시간이 나는 대로 더 돌아다니고 더 경험하기로 했다. 주말에 오후 시프트가 있으면 오전에 서핑을 가기도 하고, 퍼블릭 홀리데이에는 마음먹고 가야 하는 곳에 놀러 가며 내 삶의 빈틈을 없앴다. 그런데도 일기장의 빈칸은 늘어만 갔다.
9시 정도만 돼도 심신이 피로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인다고 20분 알람을 맞춰놔도 한 번도 알람을 듣고 일어난 적이 없었다. 피곤하다고 운동을 소홀히 했더니 체력이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하루에 최소 30분은 운동을 하려 했다. 운동을 간다고 하고서도 침대에 기절해 있을 때가 있었지만.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식사 때가 아닌 때에 계속 뭔가를 먹었다. 카페 일이 끝나고 2시쯤이면 이미 2시간 전에 밥을 먹었는데도 입이 뭔가를 찾았다. 특히 초콜릿, 쿠키와 같은 단순당이 미친 듯이 당겼다. 당연히 살이 찌기 시작했고 턱, 배, 허벅지에 붙은 살을 보며 한숨만 늘어갔다. 그러나 육체노동 후에 저렴한 단순당을 섭취하는 나 스스로가 정말 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단순한 식욕 문제라고 생각하고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유산소 운동과 더불어 마일리 사이러스 하체 운동과 복근 운동, 몸이 뻐근한 날에는 아쉬탕가 요가를 하며 칼로리도 태우고 바디 라인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단 조절을 위해 카페,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스탭 밀(staff meal) 대신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실제로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니 식욕이 억제되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인지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일하던 카페는 런치 타임에 주문이 밀려드는 정신없는 환경이었다. 영수증을 읽고 빠릿빠릿하게 조리를 해야 하는데 모든 주문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실수도 늘어서 일을 시작할 때보다 실수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사장님의 잔소리와 핀잔이 늘어갔고, 스트레스와 압박도 함께 늘어갔다. 카페에서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에서는 동문서답을 했다. 자연스레 그들의 대화가 늘어났고 소외감, 적대감, 불안감 등 사람을 미치게 하는 감정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카페에서 일을 할 때면 숨이 턱턱 막히고 속이 답답했다. 일이 끝나고 나면 배터리가 1% 남은 휴대폰 같은 몸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변한 내가 너무 이상하고 무서워서 번아웃 자가 진단을 해봤는데 모든 설문 항목이 내 얘기 같아서 허탈한 충격을 받았다.
"기력이 없고 쇠약해진 느낌이 드나요? 네."
"일하는 것에 심적 부담과 자신의 한계를 느끼나요? 네."
"충분한 시간의 잠을 자도 계속 피곤함을 느끼나요? 네."
"주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네."
...
나 이렇게나 지쳤구나.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을 떠나자.
워킹 홀리데이인데도 어렵게 구한 일에만 매달리느라 여행 자체를 망설이게 되어버린 나를 위해.
워홀러의 로드트립답게 페이스북 백패커 그룹에서 동행을 구했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여자 4명이서 떠나는 퍼스에서 2000km 떨어진 엑스마우스(Exmouth)를 찍고 돌아오는 2주 로드트립이었다.
사장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갑작스럽게 그만둔다는 말씀을 드릴 때, 사장님이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보시며 말씀하셨다.
"돈이 그렇게 급했던 거 아니었잖아. 왜 그렇게까지 투잡을 부여잡고 있었던 거야."
뭐 하러 그렇게 스스로를 소진시켰을까. 마음이 씁쓸했다.
작년에도 주중에는 서울에서 인턴십을, 주말에는 포항에서 뮤지컬 연습을 하며 양쪽에서 모두 지쳐버린 경험이 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도, 지금도 번아웃이 온 거였다.
스스로를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사고가 나기 직전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렇게 깨닫고 나서도 살다 보면 개인의 성취욕에, 돈에, 또 다른 어떤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달려갈 수도 있겠지. 그런 콘크리트 같은 삶이더라도 민들레 하나 정도는 뿌리내릴 수 있는 틈을 두고 살아야겠다.